밤의 선전포고

by 은기

수많은 밤샘 작업과 고통스러운 피로 끝에, 드디어 공모전 제출 마감일이 밝았다. 현우는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작품을 점검하며 공모전 작품을 완성했다. 그의 손끝은 굳은살로 가득했고 눈은 충혈되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기나긴 여정의 끝을 알리는 후련함과 열정이 교차했다. 마침내 제출 버튼을 누르는 순간, 현우의 팀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민서 역시 현우에게 달려와 "선배,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외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현우는 모든 것을 쏟아낸 듯 자리에 주저앉아 깊은 숨을 내쉬었다. 공모전의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쳤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함을 느꼈다.

최종 제출을 마친 후 현우는 팀원들의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고 자축하기 위해 학교 앞 술집에서 뒤풀이를 열었다. 시끌벅적한 술집 안은 해방감에 가득 찬 건축학과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다들 술을 마시며 그동안의 고생을 풀고 있었다. 그때 민서가 술에 취해 현우에게 다가왔다.

"선배, 할 말 있어요. 저 선배... 진짜 좋아해요.”

민서의 폭탄선언에 모두가 숨죽였다.

그때 한 후배가 당황하며 "민서야, 너 취했어? 그만 마시고 들어가자.”라고 민서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민서는 후배의 손을 뿌리치고 현우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선배, 저... 선배랑 자고 싶어요.”

현우는 민서의 말에 굳어버렸다. 주변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현우는 민서의 손을 잡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에 닿자 민서는 조금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현우는 민서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서야, 너 많이 취했나 보다. 진정해. 그리고 오늘 네가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할게.”

민서는 현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선배, 저... 오랫동안 선배 좋아했어요. 1학년 때 선배의 작품 발표를 처음 봤어요. 그때부터 전… 선배처럼 되고 싶었어요. 올해 선배가 추가 팀원을 뽑는다고 했을 때 전 밤잠도 설치며 준비했어요. 선배 옆에서 선배가 가진 모든 것을 배우고 싶었거든요. 처음에는 저도 선배에 대한 마음이 동경과 사랑 그 어디쯤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선배 옆에서 배우고 같이 작업하면서 선배에 대한 마음이 더욱 커져버렸어요.… 현우 선배… 좋아해요.”

민서의 말에 현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민서야, 네 마음은 고맙지만, 받아줄 수는 없어. 미안하다.”

민서는 고개를 숙였다.

"알아요. 선배한테는 최지수밖에 없다는 거... 근데... 내 마음을 선배한테 말하고 싶었어요…. 선배… 저랑… 한 번만… 자요.… 전 처음이 선배였으면 좋겠어요.”

"민서야, 난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같이 자.”

현우의 단호한 거절에 민서는 현우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현우는 민서를 집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술집 안으로 들어가 후배들에게 민서를 부탁하려고 했다.

"민서야, 너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현우가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을 때, 민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현우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민서야! 오민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현우는 민서한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는 팀원들과 함께 민서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술집 주변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 후배가 현우에게 말했다.

"선배, 민서가 선배 좋아하는 거 우리는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폭탄 선언을 할지는 몰랐네요.”

다른 팀원이 거들었다.

"형. 민서가 형 좋아하는 줄 눈치 못챘어요? 민서가 저희한테는 절대 안 그러는데, 형한테만 유별나게 잘하잖아요.”

현우는 팀원들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민서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 꿈에도 몰랐다.

그저 붙임성이 좋은 후배라고, 내가 아프니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때, 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수였다.

"오빠, 뒤풀이 다 끝났어?” 현우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오빠, 왜 말이 없어? 혹시 무슨 일 있어?” 지수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났다.

현우는 지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횡설수설했다.

"지수야, 뒤풀이 하는 도중에 민서가 사라졌어. 아니, 민서랑 내가 잠깐 밖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

후배한테 민서를 데려다 주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없어졌어.” 현우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수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현우는 민서가 술에 취해 폭탄 발언을 한 것, 그리고 민서가 사라진 상황까지 모두 설명했다. 지수는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민서 선배 찾으면 늦게라도 연락줘.”라고 덤덤히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현우는 끊어진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현우는 지수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다음 날 지수는 오전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로 향했다. 복잡한 수학 이론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어젯밤 일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수업이 거의 끝날 무렵, 강의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민서 선배였다.

민서는 강의실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지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지수는 민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했다.

"지수야, 수업 다 끝났어?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민서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밝았지만, 그 안에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네. 정리만 하고 갈 테니 근처 카페에 가 계세요.”

"그럼 먼저 <단솜>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지수는 빠르게 정리를 하고 학과 사무실에서 전달사항을 받은 후 <단솜>으로 향했다.

지수는 카페에서 민서를 발견한 후 자리에 앉자마자

"무슨 할 이야기라도 있어요?” 하고 차갑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민서에 대한 불쾌감이 묻어 있었다. 민서는 지수의 싸늘한 태도에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지수를 향했다.

"어제 내가 현우 선배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어.”

민서의 고백에 지수는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예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황당함이 먼저 밀려왔다.

"네가 어제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듣는 것보다는 당사자인 나한테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지수는 민서의‘우리 사이' 라는 표현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민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오랫동안 선배를 좋아했어. 현우 선배가 복학하면 고백하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네가 선배 옆에 있더라구.”

지수는 민서의 뻔뻔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요?” 차갑게 되묻자, 민서는 식은 커피 한잔을 마시며 결심한 듯 지수를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까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어. 어떻게 할까 하고. 현우 선배 성격상 고백을 받았으니 나랑 더 이상 같이 작업 못한다고 말할것이 분명하니깐. 그냥 그날 술김에 헛소리 했다고 웃으며 넘길까하고 고민 좀 했지. 근데 그런 생각이 드는거야. 어렵게 고백했는데 그냥 밀고 나가자.” 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내 방식대로 선배한테 다가갈 테니, 너도 네 방식대로 선배를 지켜.”

민서의 도발에 지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더 이상 선배 말 듣고 앉아 있을 이유가 없네요. 선배 마음 잘 알았으니 열심히 노력해보세요. 근데 사랑은 쌍방이어야 되는데 일방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선배가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요. 우리 사랑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랑이 아니랍니다. 내가 있는 한 선배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현우 오빠가 선배를 선택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 미리 알려주고 싶네요.”

지수는 벌떡 일어나 민서 곁을 지나쳐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민서가 지수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 그럴까? 선배가 만일 Nova Structure에 취직하면? 그때도 둘의 관계가 지금과 같을수 있을까? 난 선배가 미국으로 가면 잠시 휴학해서 경험도 쌓을 겸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이야. 다행히 아빠 회사의 미국 지사가 Nova Structure랑 가깝더라구. 그런데 너는?” 민서의 말에 지수는 멈칫했다. 그리고 지수는 민서를 노려보았다.

"선배는 왜 제가 한국에만 있을 거라 생각하죠?” 지수는 민서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지수는 분노와 짜증이 뒤섞인 감정에 숨이 막혔다. 그리고 지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은 절대 현우를 뺏기지 않겠다고, 민서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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