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서의 폭탄 발언 이후, 현우의 마음은 내내 무거웠다. 그날의 뒤풀이가 끝난 후, 민서는 그에게 어떠한 연락도 하지 않았다. 현우는 민서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그녀의 마음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난 후, 현우는 곧장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민서가 소지품을 챙기고 있었다.
현우는 민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민서야, 이야기 좀 하자.”
민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노을처럼,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현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민서야, 네 마음은 정말 고맙고 소중해. 하지만 나는 너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어. 너는 내가 아끼는 후배일 뿐이야. 그 이상은 생각할 수가 없다. 미안하다.”
현우의 진심이 담긴 거절에 민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물기가 맺혔다.
한참을 침묵하던 민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저에 대한 선배의 마음 알아요. 굳이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요. 그냥 제가 선배를 오랫동안 좋아했으니깐 알리고 싶었어요. 내 감정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깐 선배 부담갖지 말고 그냥 선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세요. 저를 어색해 하지도, 멀리하지도 마시구요.”
민서의 말에 현우는 그녀를 위로할 수도, 좋아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때 민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개인적으로 준비해야 할 일이 있어서 Nova Structure 공모전은 도와드릴수가 없을 것 같네요. 죄송해요. 좋은 소식 있으면 연락 주세요” 현우는 민서의 말에 그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현우는 Nova Structure 공모전에 최종본을 해외설계회사의 니즈에 맞게 수정하여 제출했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현우는 불안한 마음으로 두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공모전 입상 소식이 먼저 들려왔다. 현우는 자신을 믿고 지지해준 지수에게 가장 먼저 알리고 싶었다. 그는 기쁨에 들떠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초조해진 현우는 곧바로 자연과학 강의동 건물로 달려갔다.
그때, 현우의 눈에 어디선가 본 듯한, 하지만 우리 학교 학생과는 다른 이질감이 느껴지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자연과학과 강의동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현우는 잠시 멈칫했다. 지수에게 들었던 '태준'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다.
현우가 그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지수가 자연과학 강의동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태준은 지수를 보자마자 다가갔다. 지수는 태준을 한 번 훑어보고 지나치려는데 태준이 지수의 손목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현우는 큰 소리로 지수를 불렀다.
"지수야!”
지수와 태준은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지수는 태준의 손을 뿌리치며 현우에게 빠르게 걸어와 팔짱을 꼈다.
"오빠, 수업 다 끝났어?”
"응, 근데... 누구야?”
현우는 태준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상대를 경계하는 수컷처럼,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태준은 현우의 눈빛을 받으며 서서히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에는 폭풍전야와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안녕하세요. 박태준이라고 합니다.” 태준이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지수는 태준의 모습에 황당해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너 지금 뭐 하냐?”
현우는 지수의 손을 꼭 잡고 태연하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지수의 남자친구 지현우라고 합니다. 혹시 지수한테 볼일이 있으신가요?”
현우는 태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태준은 현우의 흑표범 같은 눈빛을 마주하며, 갑자기 그 단단한 눈빛에 균열을 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수한테 공연 티켓을 주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 되어 직접 만나서 전해주려고 찾아왔어요. 우리 지수가 저희 밴드 공연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태준은 '우리 지수'라는 말에 은근히 힘을 주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현우는 태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시간이 되면 같이 가도록 하죠. 그리고 공연 티켓은 안 주셔도 됩니다. 가게 되면 제가 직접 사서 갈테니 더 이상 지수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건 지수 남자친구로서의 경고입니다.”
현우의 싸늘한 반응에 태준은 피식 웃었다.
"아, 네… 근데 어쪄죠? 제가 지수한테 미련이 남아서 앞으로 나타나지 않겠다는 약속은 못 할 것 같네요.
아무튼 공연 때 뵙게 되면 좋겠네요. 깜짝 이벤트도 있으니까요.” 태준은 현우를 향해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뒤돌아섰다.
현우는 태준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지수는 현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살며시 그의 품에 안겼다.
현우는 그제서야 지수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고 안아주었다.
"오빠.” 지수의 따뜻한 목소리에 현우의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지수의 손을 잡고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참, 지수야, 좋은 소식이 있어. 내 작품이 건축 설계 공모전에 대상으로 뽑혔어!”
지수는 현우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쁨에 들떴다.
"진짜? 오빠, 너무 너무 축하해!”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기뻐했다.
그때 현우의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팀원들, 교수님들, 심지어 동기들에게까지 온 축하 메시지에 현우는 입꼬리가 내려갈 줄 몰랐다. 그는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지수에게 말했다.
"지수야, 지금 동기들이 학교 앞에서 축하 파티 한다고 모이래는데. 같이 갈래?”
지수는 현우의 말에 활짝 웃었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오빠를 축하하는 자리인데 내가 빠질 수 없지!”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현우의 동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수는 현우의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상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리고 현우가 내 남자친구라는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