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와 현우는 각자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현우는 Nova Structure 입사 준비에, 지수는 교환학생 선발에 필요한 서류 작업에 시간을 쏟았다. 두 사람은 바쁜 와중에도 서로에게 따뜻한 격려와 애정을 아끼지 않으며 단단해진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우는 후배들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민서가 갑자기 휴학을 했다는 것이다. 현우의 마음은 순식간에 복잡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설마… 나 때문에?’ 그가 민서의 마음을 거절한 것이 학교 생활을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닌지, 자신이 그녀에게 너무 차갑게 대했던 것은 아닌지 죄책감을 느꼈다. 며칠을 고민하던 현우는 결국 민서에게 연락을 했고, 어렵게 약속을 잡았다.
조용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현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서야, 갑자기 휴학했다는 이야기 들었어. 혹시… 그때 있었던 일 때문에 학교 다니기가 껄끄러워서 그러는 건 아닌지 해서. 혹시 그렇다면... 정말 미안하다.”
민서는 현우의 말에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미소를 지었다.
"선배,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에요. 물론 선배와 있었던 일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아주 편안하지만은 않았지만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사실은 현장 경험을 쌓기 위한 좋은 인턴 자리가 나와서 휴학을 하는 거예요.”
현우는 그 말에 안도하면서도 궁금증이 생겼다.
"아, 그래? 축하한다. 그럼 어느 회사 인턴으로 가는 거야?”
"저희 아버지 회사에서 미국 지사로 가게 됐어요. 그리고 Nova Structure에 취직되신 거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우리 건축학도에게는 꿈의 직장인 곳에 입사하시다니 정말 선배님은 대단한 것 같아요. 그리고 김 교수님께서 선배님을 교수로 만들려고 회유한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정말인가요?”
"그렇긴 한데, Nova Structure에서 경험을 쌓고 나중에 교수가 되는 것을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 김 교수님께 잘 말씀드렸어.”
"까다롭기로 유명한 김 교수님도 선배님을 아끼시는 것을 이렇게 티 내시다니...
선배, 모든 교수님께 사랑 받는 기분은 어떤 거예요?”
"까분다.” 현우는 놀리는 듯한 민서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참, 제가 가는 미국 지사가 Nova Structure 본사랑 멀지 않더라고요. 선배는 미국에 가셔도 잘 적응하겠지만 전 낯선 환경이 두렵기도 하니깐 제가 SOS 치면 도와주셔야 해요. 그 먼 곳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내면 좋잖아요.”
현우는 속으로 충격을 받았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우연일까? 아니면 민서가… 계획한 걸까?’ 그는 민서의 환한 미소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읽어내려 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완벽하게 순수해 보였다.
한편, 태준은 지수와 연락이 닿지 않고 공연에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복잡했다. 그는 지수의 냉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난 늦은 밤, 태준은 지친 기색 없이 지수의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밤늦게 과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지수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태준은 고개를 들었고, 지수를 보자마자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지수야.” 지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너 지금 뭐 하냐?” 태준은 지수의 두 손을 잡았다.
"너 만나려고 기다렸어. 너 내 번호 차단했니?”
"응.”
"... 그렇게 내가 용서가 안 되니? 나는… 나는 아직도 너 못 잊었어. 사랑해, 지수야.”
태준은 절박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지수는 태준의 손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나는 이미 네가 없는 삶에 익숙해졌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곁에서 행복해. 네가 나한테 줬던 상처, 너와의 기억들 이젠 생각조차 안 나. 그러니깐 제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지수는 냉정하게 선을 긋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자식이… 너한테 ‘우애수’야? 너가 좋아하는 숫자. 영원히 너의 반쪽에만 붙여준다는 그 별칭. 나는 너랑 사귀면서 한 번도 가지지 못했는데 그 자식은 가졌더라. 너도 나 사귀면서 너의 마음 나한테 다 주지 않은거 아냐? 근데 왜 나만 너에게 상처 준 것처럼 말하는데?" 태준은 지수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너 뭐야? 어떻게 알았어?” 지수는 뒤돌아보며 물었다.
"뭐를? 너에게 ‘우애수’라는 의미를? 아님 그 자식이 ‘우애수’라는 것을?”
"둘 다.”
"정말 다 잊었나 보네... 너에게 처음으로 작곡해준 노래 듣고 너가 제목을 ‘우애수’라고 하자고 했으면서... 나한테 우주에서 단 한 쌍밖에 없는, 신의 손길로 맺어진 신비로운 숫자라고 말도 했는데... 정말 나랑 사랑했던 것은 다 잊은 거야?”
태준은 슬픈 눈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태준아, 그만하자. 지겹다. 난 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해할 그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싶지 않아. 이젠 앞으로 나 찾아오지도 말고 우연히 만나더라도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가자.”
지수는 싸늘한 말을 남기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태준은 닫힌 문 앞에서 무너지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