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우애수
비행기에서 내린 현우와 지수는 숙소에 짐을 풀 새도 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운명처럼 마주쳤던 짜뚜짝 야시장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열기와 활기가 넘치는 야시장의 공기가 지수를 감쌌다. 지수는 낯선 땅에서 방황하던 과거의 자신과, 그런 자신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었던 현우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너 여기서 길을 잃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잖아. 그날 우리가 여기서 코코넛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는데. 기억나?”
"당연하지. 그때 먹은 코코넛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맛있었는데”
현우는 지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그때 그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다시 사 먹고, 복잡한 인파 속에서 서로의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단단히 잡았다. 길거리 음식점에서 태국식 팬케이크인 로띠를 나눠 먹으며 현우는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자, 이제부터 지수와 현우의 방콕여행을 기록 하겠습니다.”
지수는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고 현우는 그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현우는 지수의 뺨에 묻은 설탕 가루를 닦아주며 입을 맞추었고, 지수는 사람들의 시선도 잊은 채 행복하게 웃었다. 그들의 대화는 온통 서로에 대한 걱정과 기대, 그리고 애정으로 가득 찼다.
"미국 가면 아침밥 꼭 챙겨 먹어야 해. 밤늦게까지 일한다고 끼니 거르면 안 돼.” 지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현우를 올려다봤다.
"알았어, 내 담당 영양사님. 지수 너도 교환학생 서류 잘 마무리하고, 혹시라도 태준 같은 불청객이 또 나타나면 나한테 바로 전화해. 지구 반대편이라도 당장 달려올 테니까.”
현우는 지수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어떤 상황에서도 지수를 지켜주겠다는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야시장에서의 달콤한 시간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지수는 방문을 열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평범했던 호텔방은 현우가 미리 꾸며둔 두 사람만의 작은 기념관으로 변해 있었다. 방 한쪽 벽면에는 현우가 지난 몇 달간 몰래 찍었던 수백 장의 지수 사진이 하트 모양으로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가장 한가운데에는 현우와 지수가 활짝 웃는 사진이 크게 인쇄되어 있었고, 그 밑에는 현우가 직접 쓴 문구가 있었다.
"너는 내 삶의 가장 견고한 초석이야. 이 사랑을 기반으로 영원을 설계할게.”
그리고 그 아래, 작은 테이블 위에는 붉은 장미꽃과 함께 심플하고 깨끗한 디자인의 반지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현우의 섬세한 노력과, 자신을 향한 변치 않는 애정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현우는 천천히 지수에게 다가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지수야, 이건 결혼 프로포즈 반지는 아니야.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네가 매일 이 반지를 보면서 내가 항상 네 곁에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 닿는 약속의 반지야.”
현우는 반지를 꺼내 지수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었고, 반지가 지수의 손가락에 완벽하게 맞는 순간, 지수는 현우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고마워, 오빠. 너무 고마워. 사랑해.”
현우가 끼워준 약속의 반지가 지수의 눈물에 젖어 은은하게 빛났다. 지수는 현우의 넓은 품에 기대어 잦아든 감동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현우는 지수의 뺨을 감싸 안고 잔잔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 키스는 감사와 안심이 뒤섞인 듯 애틋하고 부드러웠다. 현우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지수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지수는 현우의 목에 팔을 감았고, 두 사람의 입술은 다시 닿았다. 이번 키스는 부드러움을 넘어, 서로의 존재를 탐하는 듯한 뜨거운 열망으로 번져갔다.
현우는 지수를 안아 올려 침대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달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 두 사람을 비추었다.
현우는 지수가 입고 있던 얇은 가디건을 천천히 벗겨냈고, 지수는 현우의 셔츠 단추를 떨리는 손으로 풀었다. 옷가지가 바닥에 무심하게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지수는 현우의 단단한 어깨와 근육진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잘 다듬어진 그의 몸에서 든든함과 동시에 뜨거운 남성미를 느꼈다. 현우는 지수의 목선에 얼굴을 묻고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체취는 세상 어떤 향수보다 현우를 안정시키고 흥분시키는 묘약이었다.
현우의 손길은 지수가 오직 사랑만을 느끼도록 세심하고도 열정적이었다.
"사랑해, 지수야.” 현우는 지수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였고, 그 말은 곧 지수에게 '나는 너의 가장 튼튼한 초석'이라는 무언의 맹세처럼 다가왔다.
새벽녘, 지수는 현우의 가슴에 기대어 나지막이 속삭였다.
"오빠, 일본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책 읽어 본 적 있어?”
"오가와 요코가 지은 소설 말하는 거야?”
"응”
"읽어봤지. 그런데 왜?”
"거기 보면 박사가 ‘우애수’이야기를 해주거든. 소설에서 박사가 가사도우미에게 말해.
‘자 보라고, 이 멋진 일련의 수를 말이야. 220의 약수의 합은 284. 284의 약수의 합은 220. 바로 우애수야. 쉬 존재하지 않는 한 쌍이지.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숫자지.라고”
지수는 숨을 멈추고 현우를 올려다봤다.
"‘우애수’는 우주에서 단 한 쌍밖에 없는, 하나의 심장을 나누어 가진 듯 완전하고 애틋한 숫자야,
자신을 전부 내어주어도, 결국 그 합은 상대방의 전부가 되는 완벽한 상호 의존과 사랑의 증명인 거지.”
지수는 현우의 손을 들어 약속의 반지가 빛나는 자신의 손가락과 깍지를 끼웠다.
"오빠가 나한테 그래. 오빠가 나에게 준 사랑과 신뢰, 내 상처를 덮어준 모든 노력. 그 모든 것을 합치면 바로 나, 최지수라는 온전한 한 사람이 돼. 나를 다시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존재. 오빠는 내 삶의 진정한 우애수며 오빠한테만 허락된 별칭이야.”
현우는 지수의 말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현우는 지수의 이마에 깊이 입을 맞추었다.
"지수야, 나는 너한테 수학 공식이나 거창한 숫자가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너에게 ‘뿌리’가 되고 싶어. 세상의 어떤 비바람이 불어도 절대 뽑히지 않는, 너를 굳건히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 너를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게 해줄 버팀목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법이야.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우애수' 야. 나는 너의 진약수를 영원히 사랑하고, 너의 완전수가 될 것을 맹세해.”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을 나누려는 듯 다시 한번 뜨겁게 입을 맞췄다. 그들의 사랑은 잠시의 이별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굳건했다.
방콕에서의 잊지 못할 며칠을 보낸 후, 현우와 지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현우와 지수의 손가락에는 현우가 준 약속의 반지가 빛났다.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관계는 방콕 여행을 통해 더욱 깊고 견고해졌다.
현우는 매일 밤 영상 통화로 지수에게 ‘우애수' 세 글자를 외치며 사랑을 고백했고, 지수는 그들의 사진이 가득한 현우의 카메라를 곁에 두고 떨어져 있을 날들을 준비했다.
다가올 이별은 여전히 아팠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방콕에서 확인한 영원한 사랑과 신뢰가 단단한 뿌리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현우와 지수는 서로를 향한 믿음과 사랑이 지구 반대편의 물리적인 거리를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음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