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간 계절의조각

#32. 너의 빈자리에 놓인 의자

by 은기

현우를 떠나보내고 지수는 허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현우가 떠난 뒤 처음 맞이하는 주말, 교환학생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하던 중 가구 배송 업체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의자 배송 건에 대한 것이었다. 지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킨 적 없는 의자였기 때문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배송된 의자를 보고 지수는 숨을 멈췄다.

이 의자는 현우가 출국 하기 전 함께 갔던 방콕여행 중 짜뚜짝 시장을 구경하다 지수가 갖고 싶어 했지만, 해외에서 사가지고 올 수 없어 아쉬워했던 바로 그 의자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자 주변을 맴돌다 지수는 현우와 함께 의자 앞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지수야, 이 의자 진짜 예쁘다. 네 방에 두면 딱이겠는데?”

“그치? 보자마자 반했어. 근데 가져 갈수가 없어서 너무 아쉽다.”

“내가 다음에 꼭 이런 의자 사줄테니 너무 아쉬어하지마.”

현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지수는 의자와 함께 동봉된 메모지를 천천히 뜯었다.


사랑하는 지수에게.

의자가 네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나는 미국에서 정신없는 생활을 하고 있겠지?

너와 영영 이별하는 게 아니라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인데도 난 너무나 슬퍼.

너와 내가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어떤 것을 선물해야 우리 지수가 나만 생각할까 고민을 하다가 우리 방콕여행 갔을 때 네가 짜뚜짝 벼룩시장에서 갖고 싶어 했던 의자가 문득 떠올랐어.

그래서 내가 직접 비슷하게 만들어봤어.

짜뚜짝 시장에서 본 디자인을 기억에서 더듬어 만들긴 했지만 처음으로 만드는 의자라서 많이 서툴긴 하다. 그래도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지수야, 우리가 다시 만날때까지 이 의자에 앉아 책도 보고 내 생각도 해.

사랑해. 지수야


메모지를 읽는 순간, 지수의 머릿속에 며칠 전 현우의 손에 있었던 자잘한 상처와 물집이 떠올랐다.

그 이유가 바로 이 의자를 만드는 과정이었음을 깨달은 지수는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저 작업하다가 다쳤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자신에 대해 자책감이 밀려왔다. 가슴이 아려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수는 뜨거운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로 의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친 사포질이 느껴지는 나무의 투박한 질감, 갓 만들어진 듯한 은은한 나무 향기, 그리고 현우의 정성이 배어 있는 손때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투박하지만 정성이 느껴지는 의자 등받이에는 "You are my today and all of tomorrows.”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 순간, 지수는 깨달았다. 이 의자는 단순히 현우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물건이 아니었다. 슬픔에 잠겨 있을 자신을 위해 현우가 먼 곳에서부터 온 마음을 다해 보내준 사랑 그 자체였다. 지수는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현우가 없는 빈자리가 아닌, 현우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에 있음을 깨닫고 느낀 깊은 안도와 감동의 눈물이었다.

그 후로 지수는 의자를 늘 곁에 두었다. 현우와 통화를 할 때도, 좋아하는 책을 읽을 때도, 그리고 앞으로의 교환학생 생활을 계획할 때도 항상 이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등을 기대면 현우의 넓은 어깨에 기대는 듯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현우는 항상 그녀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자가 매일 속삭여주는 듯했다.

7월,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지수는 조용히 생각했다. 이제 그녀의 자리에는 현우가 직접 만든 의자가 있고, 현우가 있는 곳에는 지수가 곧 갈 것이다.

이 의자처럼 단단하게 이어질 두 사람의 미래를 믿으며.



*지금까지 <스쳐간 계절의 조각>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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