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제시어- 가을
#01. 덫에 걸린 여행자 — 무한 반복의 시작
늦가을, 미국의 한 대학 도시.
단풍잎이 핏빛처럼 물든 거리는 왁자지껄한 축제의 열기로 들끓었다. 배낭여행 중인 대학원생 가은은 이곳의 대규모 할로윈 축제에 매료되었으나, 낯선 곳의 혼란스러움에 길을 잃었다.
그녀의 시선은 광장 중앙에 세워진 기이한 철제 조형물, '무한의 조각'에 꽂혔다.
작은 조각들이 모여 큰 조각을 이루고, 그 큰 조각이 다시 전체와 완벽하게 닮은 모양을 이루는,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 복제 형태였다.
가은은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폰 화면에 섬광과 함께 알 수 없는 오류 메시지가 떴다가 사라졌다.
가은이 놀라서 고개를 든 순간, 공포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반복>: 방금 광장을 가로질렀던 해골 밴드 행렬이 광장 입구에서 완벽히 똑같은 리듬으로 재등장했다. 밴드 리더가 외치는 “Trick or Treat!” 구호, 그리고 그 뒤를 따르던 피 묻은 좀비 간호사들의 비틀거리는 걸음까지 모든 것이 같았다. 가은은 시계를 확인했지만, 시간은 9시 30분에서 멈춰 있었다. 가은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시간의 무한 루프에 갇혔음을 깨달았다.
#02. 코스튬들의 끈질긴 캐스팅
가은은 공포 속에서 루프를 깨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경로를 선택해도, 도시는 그녀를 다시 광장으로 돌려보냈다.
<두 번째 반복>: 가은은 밴드 행렬을 피해 옆 골목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그녀는 드라큘라 백작 코스튬을 한 중년 남성을 만났고, 공포에 질려 "이곳을 나가는 문이 어디예요?"라고 물었다. 드라큘라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려 했다. 하지만 다음 루프가 시작되자, 그녀는 다시 9시 30분의 광장에 서 있었다.
<세 번째 반복>: 가은은 드라큘라를 만나기 전에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녀는 분수대 옆에서 수녀 복장을 하고 피눈물을 흘리는 여성과 마주쳤다. 가은이 도와주려 손을 내밀었지만, 수녀는 기계처럼 피눈물을 흘릴 뿐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9시 30분.
<네 번째 반복>: 가은은 이제 루프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밴드가 등장하는 순간, 강시 코스튬을 한 무리에게 달려가 그들을 막아보려 했다. 강시들은 기분 나쁜 기합 소리를 냈지만, 그녀의 팔을 무시하듯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9시 30분.
가은은 노트에 절망적으로 적었다.
“드라큘라, 수녀, 강시… 이들은 이 밤의 배역들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들의 역할은 바뀌지 않는다. 나의 행동까지도 이미 이 루프에 다음 순서를 위한 장면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의 모든 발버둥과 자유의지조차, 이 무한한 밤이라는 거대한 ‘대본'을 계속 돌리는 톱니바퀴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니라, 영원히 갇힌 조연이었다.
#03. 뒤섞이는 세상 — 뫼비우스의 미로
가은은 모든 기력을 잃고 '무한의 조각' 조형물 옆 벤치에 주저앉았다. 체념 속에서 루프가 다시 시작되었다.
천사 코스튬의 남자가 다가왔다.
“길을 잃었나요?”
가은은 공허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저는 이 밤을 계속 돌리는 톱니바퀴예요.”
남자가 돌아서자, 가은은 그의 등 뒤 천사 날개를 보고 충격에 빠졌다. 날개는 안팎의 구분이 없이 하나로 꼬여 있었다. 마치 종이를 한 번 꼬아 붙인 뫼비우스의 띠처럼, 날개의 안쪽 면을 따라 걷는다면 반드시 바깥쪽 면에 도달하게 될 것처럼 보였다.
공포의 성질이 변했다. 이전이 시간의 덫이었다면, 이제는 공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뒤섞임이었다.
가은의 눈에 비치는 세상도 꼬이기 시작했다. 거리의 표지판, 건물 벽의 포스터, 심지어 호박등의 미소까지, 모든 평면적인 것들이 뒤틀려 ‘안과 밖이 연결된 단일한 면’이 되어갔다.
그녀는 ‘무한의 조각’으로 향했다. 조형물의 뼈대는 온통 뫼비우스 띠 모양으로 꼬여 있었다. 그녀는 조형물 안쪽처럼 보이는 곳에서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그녀는 항상 조형물의 바깥쪽 표면을 밟고 있었다. 이 도시는 이제 ‘입구와 출구의 구분이 없는 영원한 미로’가 된 것이다.
#04. 경계의 상실과 영원한 할로윈
가은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꼬인 공간을 해체하려 했다. 그녀는 뫼비우스 띠를 억지로 자르면 더 길고 복잡하게 꼬인 하나의 고리가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축제용 현수막을 칼로 잘랐다. 현수막은 두 조각으로 분리되지 않고, 뱀처럼 꿈틀거리며 두 배로 길게 늘어난 하나의 띠가 되어 공중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루프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던 코스튬들이 해체되었다.
해골 밴드의 의상, 좀비 간호사의 찢어진 스타킹, 드라큘라의 망토가 모두 두 개의 띠로 분리되었다. 하나의 띠는 평범한 의상 천이었고, 다른 하나는 핏빛으로 물든 뒤틀린 인간의 살점 같은 섬뜩한 형상이었다.
가은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 미로를 해체하려 할수록, 이 도시는 더 크고 복잡하게 꼬인 새로운 공포를 창조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벤치에 앉았다. 이제 그녀의 의식마저 꼬이기 시작했다. ‘루프에 갇혔다는 절망'과 ‘경계가 사라져 자유롭다는 착각'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었다.
마지막 순간, 천사 코스튬의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의 뫼비우스 날개는 붉은 달빛 아래 번쩍였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남자가 물었다.
가은은 벤치에 기대어 꼬여있는 ‘무한의 조각'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체념과 초월이 뒤섞인 듯 섬뜩했다.
"갈 곳이 없어요. 제가 이 세상의 어느 면에 있든, 안이든 밖이든, 결국은 같은 면이니까요.”
그녀는 이제 경계가 사라진 영원한 할로윈의 일부가 되었다. 끝없이 반복되면서도, 안팎이 없는 이 꼬인 미로 속에서, 수많은 코스튬들이 그녀를 지나쳐가며 "Trick or Treat!”을 외쳤다. 가은의 영원한 밤은 그렇게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