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제시어-나이
#1. 저주받은 능력: 존재의 무게를 읽다.
세상이 거대한 유치원으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나뿐이었다.
출근길 지하철, 완벽하게 다려진 수트와 중후한 백발을 가진 노신사의 머리 위에는 조잡한 형광색 숫자로 ‘8’이 떠 있었다.
여든 살의 육신에 깃든 여덟 살의 영혼.
그 기괴한 불일치를 목격한 순간, 내 귓바퀴 안쪽에서 아주 미세한, 정밀기계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치익, 철컥’ 하는 금속성 소음이 들려왔다.
나는 빠르게 눈을 비볐다. 지독한 야근이 만들어낸 환각이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옆 칸을 보았을 때, 나는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각기 다른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서류 가방을 쥔 중년 사내의 머리 위에는 ‘11’이,
명품 가방을 든 여인의 머리 위에는 ‘5’가 떠 있었다.
반면, 낡은 문제집을 보며 졸고 있는 고등학생의 머리 위에는 ‘45’라는 육중한 숫자가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평온했다. 오직 나만이 세상의 저울이 매겨놓은 잔혹한 등급표를 보고 있었다.
#2. 검증: 숫자의 규칙
처음에는 그 숫자가 수명이나 운명 같은 초월적인 데이터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숫자의 본질을 깨닫게 된 건, 출근길 지하철에서 벌어진 한 소동 때문이었다.
취객 하나가 옆 자리에 앉은 임산부에게 고함을 치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봤다. 그들의 머리 위 숫자는 정지된 화면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구석에 앉아 있던 한 마른 청년이 일어섰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취객을 제지하며 임산부를 보호하는 순간, 내 귓가에 ‘치익-' 하는 금속성 소리와 함께 청년의 머리 위 숫자가 ‘18’에서 ‘20’으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반면,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던 덩치 큰 사내의 숫자는 ‘32’에서 ‘31’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단순한 데이터값이 아니야. 이건 행동의 결과값이다.'
나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거울을 봤다, 내 머리 위에는 ‘39’가 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숫자의 의미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종의 실험을 시작했다.
행정직 공무원으로서 내가 가진 권한 안에서 ‘선택'을 던져보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했다. 민원인의 불평을 듣기 싫어 동료에게 업무를 떠넘기자 내 머리 위 숫자는 즉각 1만큼 깎여 나갔다. 반대로,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누군가의 항의를 끝까지 들어주며 내 잘못이 아닌 일에 사과를 건넸을 때, 숫자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왔다.
숫자는 선행의 양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짊어지기로 한 책임의 무게’였다. 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영혼은 가벼워져 숫자가 줄었고, 손해를 감수하고 진실을 짊어지면 영혼은 무거워져 숫자가 늘었다.
‘39’실제 나이 서른여덟보다 고작 한 살 많은 숫자.
나는 그 한 살의 차이를 지난 10년의 공직 생활 동안 내가 감내했던 자잘한 스트레스와 양심의 보상이라 여기며 안도했다. 적어도 나는 지하철에서 보았던 노신사처럼 자기 몫의 무게를 다 내버린 ‘8살짜리 노인’은 아니라는 사실에 비겁한 우월감을 느꼈다.
#3. 심판: 8살짜리 과장의 제안
어느날, 부서 내에서 공공택지 개발 정보 유출 건으로 인해 사건이 일어났다.
정책의 허점을 이용해 누군가 투기 세력에 정보를 넘겼고, 그것을 알게 된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범인은 명확했다. 부서의 실세이자 나의 상사인 김 과장이었다.
그는 늘 결정적인 순간마다 “윗선의 판단”이라며 책임을 유예해 온, 머리 위 숫자가 ‘8’에 불과한 노인이었다.
긴급 대책 회의가 열린 회의실, 김 과장은 8살 특유의 천진난만한 잔인함으로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는 시말서 더미를 내 쪽으로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박대리, 이번 일은 실무자인 자네가 총대 좀 메주게. 이건 조직을 위한 전략적 희생이야, 알지? 자네는 아직 젊으니 내가 나중에 확실히 뒤를 봐줄게.”
그 비겁한 말을 내뱉는 순간 그의 숫자가 ‘6’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의 주름진 얼굴 위로 빛나는 숫자 ‘6’.
그는 자기가 저지른 오염의 무게를 단 1그램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이었다.
그때였다. 귓가에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철컥, 쿠구궁.’
거대한 톱니바퀴가 내 영혼을 분쇄기에 넣고 돌리는 듯한 압박감.
그리고 나는 느꼈다. 회의실 천장, 혹은 허공 어딘가에서 정교한 렌즈 같은 시선이 나를 조준하고 있음을.
“아니요. 과장님. 이 모든 정보는 과장님이 유출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알고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 모든 건 과장님의 지시였고, 저의 방관이 만든 범죄입니다.”
회의실은 얼어붙었다. 김 과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 순간, 내 머리 위에서 벼락같은 기계음이 울렸다.
‘징-’ 하는 금속성 진동과 함께 내 숫자가 ‘42’로 폭등했다. 생애 처음 느껴보는 영혼의 충만함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적 사형선고였다.
#4. 성숙의 형벌, 그리고 변해버린 세계
일주일 뒤, 나는 ‘조직 화합 저해 및 허위 사실 유포’라는 명목으로 파면되었다.
짐을 싸서 나오는 내게 동료들은 냉소적인 시선을 던졌다.
“적당히 좀 하지, 혼자 깨끗한 척하더니 꼴 좋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12’, ‘15’ 같은 비겁하고 안전한 숫자들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거울을 꺼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낡은 구두와 해진 양복을 입은 파면당한 백수의 초라한 몰골이었지만, 거울 속 내 머리 위의 숫자는 여전히 ‘42’였다.
“엄마, 저 아저씨는 왜 저기 앉아 있어?”
“쉿, 정원아. 보지 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되는 거야. 빨리 가자.”
젊은 엄마는 아이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이의 머리 위에는 타인을 경멸하는 법부터 먼저 배운 듯한 ‘3’이라는 숫자가 위태롭게 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원 한복판의 대형 전광판에서 정부의 긴급 발표가 나오고 있었다.
[신규 사회 정책 안내: ‘성숙 마일리지' 도입.
모든 시민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수치화하여 세금 감면 및 복지 혜택 차등 부여.]
뉴스는 이어졌다.
이제부터 국가는 개인의 선택을 데이터로 추적하여 ‘성숙도 점수'를 공식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내가 보았던 그 환각 같은 숫자가, 이제는 국가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모든 이의 이마에 낙인찍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제 누가 진짜 어른인지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혜택을 받기 위해' 선행을 연기해야 한다는 강박이 서려 있었다. 나는 숫자‘42’의 무게를 짊어진 채 파면되었지만, 사람들은 이제 ‘혜택'을 위해 숫자를 쇼핑하듯 수집하려 들 것이다.
고결한 희생은 사라지고, 오직 보상을 위한 연기만이 남은 세상.
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스스로 짊어진 나의 성숙은 고결한 덕목이었으나, 이제 국가가 강요하고 타인이 채점하는 저 숫자를 과연 성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성숙은 개인의 내면에서 피어나는 향기인가, 아니면 사회가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우리를 말처럼 부리기 위해 들이미는 규격화된 잣대인가.
하늘 위에서 다시 한번 정교한 카메라 셔터 같은 빛이 번뜩였다.
나는 더 이상 그 빛이 무섭지 않았다. 다만 슬펐다.
진짜 어른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스스로 삶을 증명하는 주인이 아니라 타인의 채점에 의해 이리저리 옮겨지는 채점판 위의 말로 남게 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