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제시어-징갑
2024년 12월 3일의 저녁은, 다른 어느 날과 다름없이 평온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고단했던 하루를 보내고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다. 가볍게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티브이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화면에 잔잔한 예능 프로그램이 흐르던 찰나, 갑작스럽게 긴급 속보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앵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가운데, 충격적인 문구가 자막으로 떠올랐다.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현실감이 없었다.
‘가짜 뉴스일 거야,’. ‘채널을 잘못 돌렸나,’ 하는 부정이 뇌리를 빠르게 스쳤다. 화면 속의 앵커는 너무나 진지했고, 그 심각함이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현실 같지 않았다.
세상이 고작 몇 초 만에 영구히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나는 침대에 기대어 누워서야 깨달았다. 집 안의 공기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난방을 높여두었는데도 바닥에서부터 미세하고 섬뜩한 냉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창밖의 바람은 유난히 얇은 유리창을 격하게 흔들었고, 그 소리는 불길한 경고음처럼 들렸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느릿하게 현관으로 걸어갔다.
다른 무엇보다 먼저 손이 닿은 것은 현관 선반에 놓아두었던 회색 장갑이었다.
몇 해째 겨울에만 사용하던 낡은 장갑. 유난히 손끝이 시렸던 그 겨울에 샀던 이 장갑은 나에게 단순한 방한 도구 이상이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내가 용기를 내야 할 날마다 함께했던 습관 같은 물건이었다. 이 장갑은 8년 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던 차가운 촛불 광장에서도 나와 함께 있었다. 수백만의 시민과 함께 서서 차가운 겨울 공기를 버텨내던 그 밤, 장갑은 내 손을 따뜻하게 지켜주었고, 동시에 침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잡아주는 징표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이 장갑은 나의 '행동'이 시작되는 순간마다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는 물건이 되었다.
장갑을 집어 들자 섬유에서 아주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손가락을 하나씩 장갑 속에 밀어 넣을 때마다, 마치 오래 접어두었던 마음이 다시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안에 있던 두려움, 답답함, 외면하고 싶었던 무력감,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책임감 같은 것들이 장갑 속에서 서서히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장갑의 따뜻함은 금세 내 체온으로 전해졌지만, 그 온기는 이상하게도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만 이어질 온도처럼 느껴졌다.
손에 장갑을 완전히 끼고 나서야,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의무감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현관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나섰다. 흙냄새와 먼지, 겨울 끝에 스며든 금속 냄새가 공기 사이에 섞여 있었다. 길바닥에 비치는 달빛은 차갑고, 사람들의 그림자만 유난히 길었다.
여의도 국회로 향하는 길이었다.
국회로 가는 길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다들 서로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그 묵음 속에서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공통의 리듬이 있었다. 걷는 속도, 숨 고르는 방식, 발끝의 긴장.
마치 조용한 악보를 따라 한 음씩 밟아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이미 하나의 의지로 연결된 집단이었다. 어떤 이는 작은 깃발을 들고 흔들었고, 어떤 이는 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 넣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고, 누구는 손이 시린 줄도 모르고 맨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쥔 채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내 장갑을 한 번 더 꼭 쥐었다.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만큼은 나 자신이 이 결의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국회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거대한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찬 바람 사이를 뚫고 올라오는 그 목소리는 단순한 분노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두려움, 누군가의 희망, 그리고 무언가를 지키고 싶어 하는 수많은 마음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먹먹한 파동이었다.
나는 그 목소리 속에 섞여 서 있었다.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한 문장, 한 단어가 내 가슴 안에서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왜 이곳에 서 있는가.”
그 질문이 문장으로 떠오르자 스스로에게 답하려는 마음이 천천히 생겼다.
나는 그 한가운데 서서, 내가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보다 왜 이곳에 서 있는지를 먼저 깊이 느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중년의 아주머니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핫팩 하나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손 시리지 않게 꼭 끼고 있으세요.”
그 한마디와 함께 핫팩이 내 장갑 바깥에 스쳤다. 핫팩의 따뜻함이 장갑의 섬유를 뚫고 손끝까지 스며들었다. 장갑 너머로 전달된 그 온기는 이상하게도, 단순한 열이 아니라 어떤 다짐이나 응원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따뜻함을 오래 쥐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손이 아니라 이 광장에 선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온기로 감싸는 듯했다.
손은 각자의 것인데 온기는 분명히 서로 연결된 것이었다.
얼마 뒤, 누군가가 앞장서서 외치기 시작했고, 광장의 모든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답했다.
내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옆의 사람의 목소리와 또 그 옆의 사람의 목소리와 더 멀리의 목소리들이 서로 녹아 섞여 하나의 거대한 숨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숫자와 울림 속에서 두려움은 희미해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희망이 작게라도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속에서 한 사람일 뿐이었지만, 더 이상 단지 혼자로서의 한 사람이 아니었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존재하는, 거대한 힘의 일부가 된 사람이 되었다.
그날 광장에서의 기억은 오래 남았다. 어떤 거창한 주장 때문도, 격렬한 구호 때문도 아니다.
나는 그저 누군가의 떨리는 어깨, 낯선 이가 건넨 따뜻한 온기,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도 서로를 묵묵히 지켜주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을 기억한다.
집에 돌아와 장갑을 벗었을 때, 손끝은 아직도 따뜻했다. 그 온기는 장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날, 누군가가 건넨 핫팩,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체온,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눈빛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약해지지 않도록 묵묵히 버텨주던 마음들이 겹겹이 남긴 온도였다.
장갑은 그 온도를 받아두었다가 집에 돌아온 순간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장갑을 현관에 내려두고 잠시 손끝을 들여다보았다. 그 미세한 따뜻함이 내가 오늘 무엇을 하고 왔는지를 말없이 설명해주는 듯했다.
그 온도는 ‘연대’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두려움보다 용기를 조금 더 믿어본 마음일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날 나는 장갑을 낀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한 마음을 손에 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의 체온이 겹쳐 만들어낸, 엄혹한 밤을 이겨낸 ‘연대의 온도’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