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와중에도 아들 미래에 누가 되지 않으려는 모성의 처절한 몸부림은 고삐 풀려 내달리는 부정 마인드까지 단속해 고물상 사장님을 스티브 잡스로 승격시키는 것이다.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마지막까지 이 여인을 도우소서.' 크게 심호흡 한 번 하는 동안 최대한 정제된 언어와 교양 있는 톤으로 시치미를 뚝 떼고 모드 바꾸기에 돌입한다.
"어머, 그게 왜 거기 있지. 아빠가 버렸나?
아빠야, 미안하다. 어차피 우리는 일심동체 아니냐. 당신이 했으면, 내가 한 거니까 새빨간 거짓말은 아닌 걸로 하자.
처음엔 아이의 욕구를 채워주는 충실한 조력자 노릇도 마다하지 않고 제법 맞장구쳐 주었다. 그런데책장 서랍이 터져나가도록 멈출 생각이 없는 저 수집증에 참다못해 연막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화장실 휴지가 대롱대롱 그 끝을 보일라치면 잽싸게 새것으로 교체하고 휴지심은 아이 눈을 피해 몰래 버리는 작전을 감행했으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휴지심에서 시작된 아이의 보물 찾기는 컵라면용기, 요거트병을 넘어 이제는 키친타올 심까지 접수하고 어느덧 내 주방살림으로까지 점점 그 영역을 확대하니 마른 산에 번지는 불을 손 놓고 구경하는 듯 속이 타서 미칠지경인 거다. 예를 들자면, 실용성이 떨어져 주방 수납장에 모셔 두었던 원목 미니 절구가 어느 날 보니 아이 책상 서랍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가 하면, 나무 도마를 사며 사은품으로 받은 머들러가 레고통에서 튀어나오는 건 이제 예삿일. 그뿐인가, 차 우릴 때 쓰려 큰맘 먹고 산 티인퓨저가 어느새 변신 마술봉이 되어 이리저리 날아다니더니 머지않아 목이 부러지게 생겼다는 슬픈 소식까지. 대충 추려 이 정도다. (이 외에도 얼마나 많겠나.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이라는 점을 꼭 밝히고 싶다.) 어느덧 내 주방살림을 호시탐탐 노리던 아이는 뛰어난 안목으로 용케도 잘 찾아내 제 상상력 실현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름 적재적소에 맞게 구색을 제법 갖췄으나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 없는 애미에게 더 이상 긍정회로는 불가능했다. 아니 유치원을 졸업한 지가 몇 년인데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 저러려나. 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까지 장단을 맞춰줘야 하나. 갱년기와 사춘기의 격돌이 머지않은 이 마당에 어느 정도 태세전환은 필요한 법. 이제 적당한 시그널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널을 뛰는 마음을 붙잡아 오늘이야 어찌어찌 버틴다 쳐도 애미의 인내심이라는 게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장거리 선수가 아닐진대 이러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일관성 없는 육아로 아이의 불안만 가중시키는 꼴이 되면 자식농사 흉작, 보릿 고개, 눈물 고개 아닌가. 혹시라도 이러다 질풍노도를 견뎌야 할 사자의 마음에 상처라도 남기는 날에는 별안간 사춘기 금쪽이로 전락한 아이가 상상력 실현이 아닌 반항심 표출도구로 내 물건들을 박살 내 버리지는 않을까. 바닥을 보이던 인내심은 결국과대망상으로까지 치닫더니 해묵은 감정까지 끄집어내 커다란 눈덩이만큼 키워비탈길로 몰아가고 있었다.
▲ 더 심한 사진은 올리기가 민망하여 수위조절을 했단다. 동영상이 딱인데 엄마도 이제 이미지 관리가 필요할거 같구나.
대체 나의 마음을 어디까지 넓혀야 너를 온전히 받아줄 수 있을까. 내가 항상 너와 부딪히는 지점은 결국 내가 나를 놓지 못해 벌어지는 행성 간 충돌 같은 것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신이 원하는 것은 너의 성장이 아니라 나라는 간장종지를 빨간 김장용 고무대야로 만드는 형질 변형,인간개조란 말인가. 여태껏 제 마음하나 조절하지 못하고 제 고집대로 안하무인 행세하며 살다가 임신이라는 벽에 부딪혀 드디어는 겸손한 인간이 되었나 싶었는데 겨우 열 살짜리랑 휴지심을 가지고 실랑이하다 정신줄을 놓는 걸 보니 아직 멀었구나.신이 인간에게 자식을 선물하는 것은 나라는 세계를 뿌리부터 흔들어 결국엔 파괴시키고 제로베이스로 만드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제대로 된 어른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세계 재정립의 기회를 주는 것이리라. 마치 소행성 충돌로 거대한 공룡들의 세계가 막을 내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새로운 현생 인류가 등장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먼지 같은 이 미물에게조차 허락된그분의 장엄한 계획에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겠는가. 하여 나는 더 부서지고 깨져야 마땅한 것이다. 그래, 30개 들이 휴지 한 팩에서 나오는 휴지심 모아봐야 뭐 얼마나 되겠나. 설마천 개를 모으랴. 크게 무거운 것도 자리 차지 하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두자.드디어는 간장종지에서 실리콘 밀폐용기쯤은 되어가는 것인지나의 마음을 쓰다듬고 보살펴주신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자.
실리콘 밀폐용기쯤은 되었다 증명하고 싶었는지 그 주 주말 아이와 함께 모아둔 휴지심을 이용해 대형그리마(돈벌레)를 만들었다. 평소에 벌레라면 질색팔색을 하던 애미가 어쩐 일인지 실실 웃어가며 조수 노릇을 잘도 해내었다. 애미는 둘째치고 아이의 흐뭇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다음엔 더 크게 만들겠다는 당찬 포부까지 밝혀 웃던 애미를 당황시켰다. 리사이클계 스티브잡스에 어울리는 현명한 어머니 따라잡기가 아니라 보기싫은 쓰레기 처리라는 음흉한 속내를 품었던 애미의 코스프레는 더 큰 그리마를 꿈꾸는 아들에게 회심의 일격을 당해 망연자실,자승자박. 꼴좋구나. 제 꾀에 넘어간 애미에게는 두루마리 화장지 두 팩이 약이로다.
"축하합니다. 어머니, 휴지심 60개 당첨되셨어요."
네 방은 앞으로도 계속 재활용 분리수거장이겠구나.
▲ 그렇게 좋니? 나도 좋구나. 그런데 진짜 60개 모을 건 아니지?
"서한아, 이게 뭐야?"
"응, 그거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공부한 카드인데 나중에 쓸 수 있을 거 같아서 모아 왔어."
"모아 왔다고? 그럼 다른 친구들것까지 다 들고 왔다는 거야?"
"응, 이거 우리 수업시간에 배운 것들이라 추억이 될 텐데 애들이 다 버린다고 해서 나 달라고 했어."
"여기 봐봐. 여름에 만날 수 있는 곤충, 꽃, 나무. 예쁜 그림 엄청 많아."
"이거 봐봐. 엄마, 대박이지."
'참도 대박이다. 이놈아.' 엄마가 보인 관심이 본인의 마음과 찰떡같이 통했다 믿는 눈치 없는 아드님께서는 신이 나서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프레젠테이션에 들어갔고 얼굴이 벌게져서 열변을 토하는 아들을 멍하게 바라보는 김장용 대야가 되긴 틀려먹은 가엾은 애미. 남에 집에 갈 쓰레기까지 긁어모아 온 이놈의 아들 새끼야. 그래 또 어떻게 품어 주랴. 이번엔, 아나바다를 이끄는 알파세대 파이오니아 정도면 되겠니. 애미는 오늘도 형질변형을 위해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께 빌고 또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