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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앤 Nov 20. 2024

천국으로 가는 급행열차

웰빙을 고수하던 애미, 드디어 인스턴트의 세계로 뛰어들다.


"망친 거 같은데?"


"얼마나 망쳤는데, 어디 봐 어디?"


가지고 놀던 레고를 집어던지고 뛰어와 까치발을 들어 수프냄비 위로 머리를 들이미는 네 모습에 살짝 짜증이 일었다. '그래 네 입에 들어가는 소중한 양식인데 네 혀에 흡족하지 않을까 그렇게 걱정되느냐. 그동안 네 입을 만족시키려 고군분투한 애미인데 한번 정도는 봐줘도 무방하지 않더냐.'


 '수프, 그 정도야 뭐. 서양죽 아니겠어.' 처음엔 호기롭게 뛰어들었다. 죽이라면 이유식부터 엄마표로 단련된 나는야 고단수. 내가 누구냐. 이 동네에서 한 솜씨 한다는 나름 부뚜막 이장금 아니겠나. 유명한 요리 유투버들의 레시피를 뒤져 그럴듯한 수프를 재현해 냈지만 아이의 선택은 냉정하게도 시판 인스턴트 수프였다. 내가 딴 것은 한식조리사 자격증임을 상기하며 버림받아 식어버린 수프인 듯 수프 아닌 수프 같던 그 수프를 꾸역꾸역 떠 넣다 깨달았다. 다소 오만함에서 시작되어 근거 없는 자존심 사수대결로 변질된 이 빅매치에서 처참히 패했음을. 어차피 나의 고객님은 한 분. 퍼스널 셰프인데 그분께서 아니라 하시면 아닌 것이다. 목적도 흐리멍덩했던 흐린 기억 속 한식조리사 자격증까지 끄집어내는 걸 보니 여간 분한 게 아닌 모양이나 좀스러웠음을 인정하는 바, 이제 거대 자본 아래 성장해 바다 건너 해외시장까지 넘보며 K푸드의 정점을 찍고 계신 그분들을 영접할 때가 된 것 아니겠나. 국위 선양하고 있는 K 인스턴트 푸드를 이리 하대하다니. 큰코다쳐도 싼 거지. 아무래도 양식은 신에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 다음 생을 허락받고 난 다음 도전해 봐도 늦지 않는다는 다소 옹색한 합리화로 위안을 삼던 그런 날이 있었더랬다.


"매번 그런 것도 아닌데 이해해 줄 수 있는 거 아냐?"

"타인에 실수는 너그럽게. 알잖아.  "


"알았어. 잘 먹을게"


언짢아진 엄마의 변명에 살짝 꼬리를 내리는 듯 조용히 식탁 의자에 앉던 아이는 깎아 놓은 사과를 입에 넣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꼬리를 쳐들고 말했.


"내일은 성공할 수 있는 거지?"


'그럼 그렇지. 꼭 그 말을 해야 되는 되는 것이냐, 아들아.' 약이 오른 황소마냥 코에서 콧김이 슝슝 나는 것을 가라앉히고 듣고 싶을 그 말을 용케도 대령했다.


"내일은 잘해볼게. 엄마 실력 알잖아." 


▲ 전채요리인 수프가 네게는 메인요리인 것을. 미안하다, 노력해 보마.


 그러니까 이날 아침 물 조절에 실패한 그 수프는 그냥 인스턴트 가루 수프였다. 지난 빅매치에서 굴욕의 쓴 잔을 들이킨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품업계 매출에 일조하는 충성스러운 소비자로 착실히 살고 있었다.(어떤 포기는 다른 의지를 단련하는 불쏘시개가 되기도 하니까) 우리가 아는 '루', 그러니까 버터에 볶은 밀가루 양 조절도 아니고 그냥 가루에 물만 잘 부으면 되는 이 간단한 조리에서 실수가 나온 것이다. 이게 무슨 요리라고 이걸 망치다니. 당혹감은 오히려 내쪽이 더 크지 않았겠나. 자, 때늦은 변명에 불과하지만 사건의 발생 배경을 차분히 설명해 보자면 이렇다. 반 정도 남았던 이 수프가루는 원래 1-2인용이 으나 최근 리뉴얼하며 최소용량이 3-4인용으로 바뀌었고 그로 인해 나의 가루 배분이 정확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아이가 좋아하는 농도가 매우 묽은 수준이라는 것이 혼재되어 물 조절에서 실수가 나왔고 결국 묽어도 너무 묽은 망작이 탄생한 것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주말 아침이니 좀 더 늦잠을 즐기고 싶던 애미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제 입은 뒷전이고 아들의 입을 위해 아직 잠옷을 입은 채로 싱크대, 냉장고를 뒤지며 좀비처럼 돌아다니다 건조기 문에 비친 산발한 제 꼴을 보고는 현타가 와 심드렁해진 것이 크게 한몫했던 거다. 그러니 수프에 정성이 들어갔을 리 없다. 나는 엄마인가, 식당 이모인가. 밥 주는 아니 밥 해야만 하는, 그래서 그것으로 내 가치를 증명해야만 하는 돌밥의 여신인. 이 날 아침 나를 흔든 것은 정체성 확인이라는 이 뿌리 깊은 질문이었고, 결과는 망한 수프가 되어 아이 앞에 놓인 것이다.




 아이에게 라면을 준 게  6살 후반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빨간 음식은 매운 걸로 인식해 케첩조차 의심하며 가자미 눈을 고 혀끝 탐색만 하던 시절, 라면스프가 샤워한 정도의 간을 해 처음으로 라면을 대령했을 때  그 반응은 실로 대단했다. 그날 이후 고생으로 일군  메뉴들의 참패에는 아랑곳할새 없이 아이의 라면 사랑은 스프양을 늘려가며 일취월장했고 이제 진정한 라면의 세계에 안착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아직 매운맛으로 승부를 보는 라면 근처엔 가보지 못하여 우리 장바구니를 채우는 것은 '육뚜기 선라면 순한맛'에 그치지만 이 정도면 대단한 진화라 본다. 그렇게 슬그머니 불량한 엄마가 되어 새 밥 하는 노동에서 해방되는 날이 늘게 되더니 어느새 처음처럼 직무유기라는 죄책감에서도 훨씬 자유로운 정도에 까지 오게 된 것이다. 마음 한번 가볍게 털어내니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그동안 나는 뭘 그리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용을 썼던 건지. 어깨에 잔뜩 실은 사명감에 굳어져 가는 것은 태도이고 마음이었으리라. 5년간 애태우며 얻은 귀한 아이이니 나의 마음가짐은 다른 이의 1년보다 농밀하고 치열해야 한다는 생각이 어쩌면 나를 꽁꽁 묶고 종국에는 너까지 묶어 숨 쉴 틈을 좁혀갔던 것은 아닐까. 나란 사람의 진지함이 어디로 튀어도 자연스러운 너의 말랑말랑함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별것도 아닌 인스턴트를 앞에 두고 참 많은 상념에 사로 잡혔었다. 


▲ 그렇게 맛있니?  앞 접시는 그만 졸업하자. 엄마, 설거지할 시간에 글 쓰고 싶어.


 그렇다면 엄마라는 이 이름에 대체 어떠한 의미가 들어가야 그럴싸해지는 것일까. 그럼 나는 그럴싸한 엄마가 되고 싶어 난리를 치며 용을 쓴 것인가. 세상에 그럴싸한 엄마는 없다. 그냥 엄마면 충분하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그냥 우리 엄마다. 옆에서 눈 맞춰가며 얘기 나누고, 맛난 게 있으면 서로 입에 넣어주고, 깔깔거리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언제 돌아와도 편히 기댈 수 있는 존재.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닐까.  존재 안에 뾰족뾰족한 규칙과 금기를 숨겨두고 편안하길 바랐다니. 그동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각오로 꽉 쥐고 있던 그 주먹 안에는 그럴싸한 엄마도, 편안한 아이도 없었던 것이다. 라면이면 어떻고 3분 카레면 어떠냐. 가끔은 불량엄마가 되어 내 숨통이 트여야 네게 허락할 내 마음의 뜨락이 더 넓고 따뜻해질 텐데 말이다. 그럴싸한 좋은 엄마 걷어치우고 그냥 엄마로 힘 빼고 살리라. 그리고 주말 아침 느즈막이 일어나 잠옷 바람에 산발한 채로 돌밥의 덫에 걸려 허우적 대는 엄마가 어디 나뿐이겠는가. 그러니 닥친 상황에 다소 시니컬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도 아니면 핸드폰 화면을 켜 스케줄표를 확인해 보라. 머지않아 울려 퍼질 매직의 종. 매달 주기적으로 우리 가정을 산산조각 내는 사금파리 제조 호르몬.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하듯 짜증 마귀 불청객 PMS까지 달고 오시니, 제발 호르몬에 속아 가시덤불 뒤집어쓰고 애먼 사람 잡지 말지어다.


그래서 준비했다. 오늘 점심은 우리 동네 최고 맛집 꼬마김밥과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라면이다. 너무 불량엄마 느낌이 나는 걸 지워보고자 라면은 너의 취향대로 섬세한 터치가 생명인 계란반숙이 올라간 엄마표임을 강조해 본다.


"앗싸~라면이다."

"후루룩 후루룩"

"와, 이건 천국의 맛이야"


그래, 라면이면 데려다줄 수 있는 천국을 그 간 나는 엄마표 웰빙을 고집하며 너의 천국행을 막은 것이구나. 기다려라. 줄줄이 늘어선 천국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를 따르라, 아들아.

천국은, 이제 시작이다.


아, 그리고 참고하거라. 그곳은 드레스 코드도 필요 없는 아주 너그러운 곳이니 애미는 잠옷을 벗지 않을 생각이다.







PMS: Premenstrual Syndrome (월경전증후군)
여성이 월경 전 다양한 신체적 혹은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증후군. 월경 전에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신체적, 정서적, 행동적 증상이 나타난다.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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