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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과 앤 Nov 06. 2024

소머즈, 귀환하다

신이 너에게 준 것은 입만이 아니었구나. 복 많은 애미는 오늘도 운다.



저녁식탁에서 사뭇 진지한 그러나 단호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아이가 물었다. 


"엄마, 그러니까 그 엄마가 누구야?"


"응. 무슨 얘기야?"


"아니, 엄마를 힘들게 했다는 그 엄마 말이야."

"누구야? 나도 아는 엄마야?"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얼른 상황을 수습해야 해서 정신을 차리고 어질러진 식탁 쓸어 담는 행주처럼 서둘러 나섰다. 


"아니야. 네가 모르는 엄마야."

"그리고 엄마를 힘들게 한 게 아니고, 엄마 아는 사람이 힘들다고 해서 위로 좀 하느라 그런 거야. "


 신이 너에게 준 것은 입만이 아닌걸 오늘 또 절감했다. 내가 낳은 것은 2015년 버전 남자 소머즈인 것도 같다. 그러니 나는 위로라는 포장 뒤에 숨은 뒷담화를 '고이 접어 나빌레라'하는 심정으로 그쯤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한  죄가 컸다는 걸  또 고백한다.




 사건의 서막이 오른 건 5년 전으로, 이제야 그것이 악연의 시초인걸 깨달은 것이지 그 우리는 육아동지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그런 사이였다. 아이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기본 인격이 엄마 인격에 절대적이라는 것을. 그러니 세상에 기본 인격이 이상한데 괜찮은 엄마는 존재하기 힘들다. 세상 어디든 '이해받지 못할', '정도를 넘어선' 그리하여 결국 인간성마저 의심하게 만드는 인간군상은 존재한다. 문제는 그이들도 결국엔  엄마가 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겐 함정이 되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유의 이야기이다. 시시콜콜 자세히 얘기하는 것은 남의 집 숟가락 젓가락 세는 일에 불과하니 이 정도에서 일단락하는 것이 나으리라. 하여 누군가는 5년 동안 언니로 따르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아 상처를 받았던 것이고 누군가는 그를 위로해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로하는 역에 충실했던 나라는 엄마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낮에는 새가 되고, 밤에는 쥐가 되는 귀가 좋은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낮 말도 주워 담고, 밤 말도 주워 담는 2015년 버전 소머즈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복화술을 연마해야 할 지경인데 통화하며 복화술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멈추지 못한 그 위로가 며칠 더 계속되었고 수비에도 급이있거늘 국대급 선수에 맞는 수비였어야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방문 잠그기라니. 애미의 모골에 또 한 번 서리 낀 새벽이 드리워질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 아닌가. 그리하여 드디어, 마침내, 결국 소머즈는 피의자를 색출하기에 이른다.


"아, 진짜. 서율이 엄마 안 되겠네"


 통화를 마치고 서둘러 저녁을 차리는데 까랑까랑한 아이의 소리가 식탁을 넘어 싱크대 앞까지 밀려 들어왔다. 그 목소리가 꽤나 옴팡진 게 한 수 가르칠 기세를 풍겨 순간 움찔했다. 블록으로 집 만드는데 열중하는 줄 알았는데 물려준 귓바퀴가 사막여우만 하지도 않은데 잘도 모아 듣는구나. 이쯤 되면 너의 귀가 아니라 신중치 못한 내 처사가 문제인 것이구나.


▲ 내가 체감하는 너의 귓바퀴 ( pixabay에 영광을)


 그날 저녁 식사를 하며 나는 솔직한 속내를 아이에게 내비쳐 협상을 빙자한 협조를 구했다.(아이들에게는 협상 테이블로 끌어올려 동등하게 한 자리를 내어 줬을때 오히려 더 잘 수긍하고 따르는 경우가 있다. 동경하는 어른들의 세계에 초대되어 어른으로 승격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인지 이해해 보려 노력하고 실제로 어른스럽게 굴기도 해 어른들을 무안하게 하기도 한다.) 어른들의 세계도 너의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고 어른도 아이 같은 마음을 간직한 채 살지만 표시 안 내려 노력하고 사는 것뿐이라고. 그러다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싸움이 되기도 하는데 누군가의 속상한 마음을 들을 때는 두 귀로만 충분히 들어주면 된다고. 우리의 입은 기쁜 일을 칭찬하고 축하할 때 쓰면 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한 것인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오물오물 육전을 씹던 아이가 말했다.


"엄마 친구 많이 힘들어해? 울지는 않았지?" 

"울지는 말라고 전해줘. 내가 울어봤는데 어차피 상처 준 사람은 울어도 자기가 잘못 안 했다고 막 우겨"

"그러니까 서율이 엄마랑 놀지 말라고 해. 둘이 안 맞아."

"놀면 또 싸워야 돼."


 솔로몬에 진배없는 현명한 판결을 고맙게 받아 드는 것으로 그날의 소동은 마무리가 되었지만 설거지를 하는 내내 나는 석연치 않았다. 누군가의 마음에 끌려다니며 중심을 잃고 흔들렸을 나와 그런 내 마음을 강타하는 작은 아이. 거인 앞에 초라히 서 있는 사람은 나였다.  




 그 주의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끝나지 않고 길어지는 비염과 독감 이후 계속되는 컨디션 난조로 제 텐션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아이가 염려스러워 한의원에 갔다. 쓸데없는 수다를 늘어놓을까 걱정되어 미리 단속을 해둔 상태여서 마음 놓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한의사와 아이 상태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와중 나의 측면 시야에 걸린 아이는 언제쯤 치고 들어올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아들아 여기서 발언권 사수는 안된다. 누울 자리를 봐가며 발을 뻗으렴. 제발 참아다오.'


그러나, 역시 가만히 계실 그럴 분이 아니지 않은가. 용케도 틈을 찾아 머리를 들이미는 너. (마음을 놓기는 뭘 놓니 엄마야. 네 아들은 항상 너 보다 한 박자 빠른 것을)


선수는 어김없이 입장한다.


"근데, 있잖아요. 엄마가 그러는데 저는 껍데기는 아빠인데 속은 엄마를 닮았대요."


그래, 그렇지. 오늘도 내가 졌다.

어젯밤 복화술을 쓰지 않은 걸 후회해 봐야 버스는 이미 떠나 질주하고 있으니 무엇하겠는가. 질끈 감은 눈을 뜨다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허탈함에 삐져 나온 내 실소 뒤로 울려 퍼지는 한의사의 너털웃음이 도리어 나를 달래주고 있었다.


그래 내가 낳은 것은 2015년 버전 남자 소머즈가 맞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복화술 학원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여차하면 소머즈를 키워내신 그 어머니를 연구하러 미국땅을 밟겠다는 각오로 내 처신을 살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현실판 소머즈가 그 아이답게 행복해하며 충실히 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돕는 것. 그래서 언젠가 올 그 시련의 상처에 제 손으로 연고를 바르고 덧나지 않게 돌보는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해, 마침내는 누군가의 아픔에도 귀 기울여 주는 귀명창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나의 임무이며 사명임을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들어라 애미야, 아이 귀를 막을 게 아니라 너의 팔랑거리는 마음에 무거운 중심추를 달을 지어다. 또한 부모라는 호수는 언제든 아이가 제 얼굴을 비춰볼 수 있거울이 아닌가. 그러니 그 호수의 물이 맑고 투명할 수 있게 거르고 걸러 부단히 수질을 관리해 줘야 비춰보던 그 물이 안전하다 느껴 뛰어들 마음도 먹지 않겠나. 유유히 헤엄치며 느낄 아이의 자유가 비로소 너를 자유롭게 할지니


애미야, 정신을 차리고 살 지어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시편23:2)


부족한 어미이나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게 하소서.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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