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외모가 좀 더 동양적이고 누가 봐도 정숙하고 지적인 여인으로 고개가 끄덕여졌으면 상황이 좀 덜했을까. 이제 이런 시답지 않은 생각까지 해야 할 지경이니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다. 이런 말초적인 이유까지 들먹여야 할 정도로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나름 쥐어짜본 것이니 오해는 말았으면 한다.(사실 그녀의 외모는 다시 태어나도 불가능할 정도로 매력적이고 많이 부럽다.) 며칠째 멀쩡한 성인남녀의 개인사가 도마에 올라 회로 쳐지는가 싶더니 결국 뼈째 다져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게 도대체 이렇게 지탄받아야 하는 문제인가. 여기가 과연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으로 문예부흥기를 맞아 세계로 훨훨 날아다니고 있는 K문화의 산실, 21세기대한민국이 맞나 싶다. 올해로 51세인 남자와 35세인 여자. 미성년도 아니고 성인 남녀의 사생활이다. 기혼자가 저지른 불륜의 현장이 아님에도 이 뜨거움은 누가 만들어 내는 것인지 의아하다.
혼외자로 만들었단다. 그게 누구인가. 만든 대상이 모호하지 않은가. 그 말인즉슨 선택할 권리는 없다는 얘기인가. 결정권자는 오로지 남자에게만 있는 것인가. 그럼 남녀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서 물어보자. 결혼을 전제하고 사귀어야 그 사랑의 결과가 인정이 되는 것인가. 결혼을 전제하지 않은 남녀의 만남은 차만 마시고, 밥만 먹고 담소만 나누다 우린 결혼할 사이 아니니까 딱 금을 긋고 오늘은 여기까지. AI도 아니고 이게 가능한가. 부주의를 비난하고 싶은 건가. 그럼 역시 AI급 인간이길 기대했다 보는 게 맞다.(여기서 중요한 피임교육 얘기까지 꺼내면 끝도 없이 길어질 테고 미성년이 아닌 책임질 능력이 충분한 성인들의 이야기이니 그것은 열외로 치겠다.) 아니라면 그다음 선택이 맘에 안 드는 것인가. 부주의해서 생긴 생명의 다음 차례는 무엇이 옳다 보는가. 선택은 둘 중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럼 다음 순서는 무엇이어야 해피엔딩이란 말인가. 가까스로 살아난 생명을 위해 안락한 가정이란 울타리를 만들어 줘야 하니 생명을 소환한 두 장본인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살아냄을 서약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다할 것. 이 정도는 돼야 그래도 감싸줄 수 있는 아름다운 스토리인가. 그럼 우리가 바란 것은 정우성의 속도위반 결혼소식이었어야 했나.
너무 숨이 막히지 않는가. 이렇게 목을 조여오는데 애초에 자신의 몸에 대한 선택권이 여성 자신에게 있다 말해도 받아질리 있겠는가. 누가 미혼모를만들었다는 것인가. 선택은 여전히 여성에게 없다는 말인가. 어디가 맘에 안 들어 이다지도 극악스러운 뒷담화를 연일 계속하고 있는가. 누구에게 DM을 보냈다더라, 예전 발언이 어쨌다더라, 제 아들을 난민 만들었다 등등. 게다가 이제는 호적 얘기가 등장하고, 한 달 양육비가 대략 얼마냐 까지. 참 대단들 하다. 남의 눈의 티끌이 이렇게까지 커질 수 있다니. 차곡차곡 필모를 쌓아 만든 이미지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의 숙명이 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그들에게 들이대는 도덕적인 잣대가 너무 엄격하지 않은가.
그리고 혼외자에 대한 비난의 수위는 어디까지 인정돼야 하는 것인가. 결혼 중에 일으킨 부정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그렇다 해도 그로 인해 태어난 아이에게까지 주홍글씨를 새기고 색안경끼고 보는 것은 어른으로서 너무 하지 않은가. 혼외자를 만들면 어쩌냐는 시선에는 이미 혼외자에 대한 차별과 무시가 존재한다. 적어도 혼외자는 만들지 말았어야지라는 지탄에는 세상 모든 싱글맘, 싱글대디 마음에 대못을 박다못해 그 슬하에서 크고 있는 많은 아이들을 모욕하는 발언 아니겠는가. 호부호형을 하지 못해 한이 쌓였던 홍길동 어르신이 지금의 상황을 본다면 혀를 차시지 않겠는가. 오던 걸음 돌려 다시 율도국으로 가시지 않겠냔 말이다.
호부를 인정했고 모든 지원을 약속했다. 무엇을 더 해야 한다고 보는가. 우리가 알던 빼어난 외모에 성실한 필모를 쌓아 올린 배우.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 발언하며 사회적으로도 책임 있는 모습을 보였던 그 우성이 오빠가 갑자기 오토바이나 타고 주먹질을 일삼던 비트의 민 보다 못한 닳고 닳은 사내의 모습으로 나타나 실망한 것인가. 아니면 그럴듯해 보이던 그 남자가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이상한 놈인지 헷갈려 짜증이 난 것인가. 혹시 21세기 잘 생긴 예수님을 원했던 거였다면 그래, 마음껏 실망하시라. 그게 아니라면 저 시끄러운 험담에 동조하지도 보태지도 말고, 이제 막 태어나 세상이 신기하기만 할 해맑은 한 생명의 귀를 가만히 막아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속삭여 주자. 이 소동은 곧 잠잠해질 것이니 건강히 무럭무럭 자라기만 하라고. 그럼에도 이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하고 축복한다고. 그리고 시끄러운 세상을 등 뒤로 가린 채 어린 아들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어미의 책임을 다하고 있을 한 여인에게 깊고 진한 포옹을 보내자. 금방 지나갈 터이니 다시 오지 않을아이와의 시간놓치지 말고 즐기시라.
생명을 욕하는 자 누구인가. 되돌아올 화살은 언제나 나를 겨냥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삼가고 또 삼가자.
아모르파티(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라틴어이며, 운명애(運命愛)라고도 칭한다. 영문은 Love of Fate 또는 Love of One's Fate.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자신의 근본 사유라고 인정한 영원회귀 사상의 마지막 '결론'이 아모르파티다.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나의 공식은 amor fati다. 그가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전부 영원히. 필연적인 것은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라, ㅡ 모든 이상주의(관념론)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ㅡ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1] 『이 사람을 보라』-프리드리히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