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나의 웃음폭탄 제조기 ○○○권사님
"어이구. 준석이, 준석이, 준석이."
그날 밤 안방에서 울려 퍼진 준석이 이름은 책망이었을망정 따뜻했다. 그때의 온기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한겨울 시린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따뜻한 아랫목으로 남아 있으니 그해 겨울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할머니와 엄마는 교회를 다니셨다. 그러나 그리 대단한 신앙심으로 극성을 떠는 교인은 아니었기에 나 또한 기독교를 운명처럼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규칙이나 규율을 따르는 것에는 성실하셨기에 꼬박꼬박 돌아오는 순서에 맞춰 우리 집은 속회 장소가 되었다. 엄마는 융숭하게 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예를 갖추시느라 부지런히 간식창고를 여닫으시며 인색하게 굴지 않는 것으로 당신의 믿음과 도리를 다하셨다. 속회(屬會)는 감리교 신도들이 구역을 나눠 모이는 구역예배로 간소한 기도회 내지는 성경공부 시간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삶에 찌들어 느슨해졌을 교인들의 믿음을 다시 팽팽히 당겨주는 종교적 장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교회의 입장이 무엇이었든 내게 속회는 좀 다른 의미였다. 매일 동네에서 마주치는 친구의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옆집 아줌마, 아저씨 등 동네 어르신들의 새로운 페르소나를 확인하는 장. 어린 나에게는 어른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호기심 충전소로 충분했다. 긴 기도와 지루한 성경공부만 잘 참아내면 맛있는 간식도 먹을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재미를 느낄 수 도 있어 내 유년을 따뜻하게 품어준 추억의 다락방 같은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빠는 세상 사는데 필요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최고라 믿는 철저한 무신론자셨다.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의 종교활동을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최소한의 지원 내지는 가정의 평화를 실천하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분에게 속회 모임은 꽤나 부담스러웠을 텐데 조용히 다른 방에서 찬송 소리, 기도 소리를 참고 계셨던 것이니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신 게 아닌가 싶다.
이 모임에서 나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었고 진작에 찾아온 노안으로 눈이 침침해 돋보기는 필수템이었다. 게다가 성경의 글자 크기하면 사전을 능가할 정도로 작지 않던가. 어른들은 귀한 아버지 말씀을 혹시라도 잘못 전할까 싶어 돋보기를 올렀다 내렸다 하시며 정성을 들이셨고 그 결과 읽는 속도가 여긴 답답한 게 아니었다. 어느 날 가장 연세가 젊으신 속장님께서 내게 도움을 청하셨고 그날 이후 나는 얼떨결에 성경 읽어주는 아이가 되었다. 국어시간에 연습한 대로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띄어 읽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신앙심이 차오른 어른들이 아멘, 아멘 화답하시는데 그 소리가 꼭 내게 하는 칭찬처럼 느껴져 뿌듯하고 우쭐해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이 모임이 내 흥미를 끈 데는 아주 결정적 이유가 있었다. 일부러 캐스팅하기도 힘들 것 같은 개성 뚜렷한 캐릭터들의 활약. 그것이 이 모임의 킬링포인트였다. 홀로 고결한 마리아 칼라스가 된 양 찬송에 취해있던 장신의 권사님, 그 옆에서 염불 같은 찬송을 멈추지 않고 꿋꿋했던 키 작은 권사님(두 분이 나란히 앉아 있다 상상해 보라.), 기도만 시작되면 아버지 하나님을 찾아 헤매시던 장로님, 끝날 듯 끝날 듯 끝이 나지 않는 기도로 애를 태우시던 집사님. 한 편의 시트콤이 따로 없었다. 그러니 매 회 방구석 1열에서 직관한 나로서는 도저히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 아니겠나.
그중 아까 말했던 한 권사님이 나와 동생의 웃음 버튼이었다. 그 권사님은 내 친구의 할머니였다. 작은 키에 목소리도 걸걸하신데 모든 찬송가를 염불로 바꿔 부르는 뛰어난 재주가 있으셨다. 권사님께 음과 박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거추장스러운 장신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권사님의 찬송가에는 악보가 없었다. 항상 가사만 크게 쓰여 있는 찬송가를 들고 다니셨다. 옆사람의 음에 당신의 청음 실력을 더해 가사만 읊었는데 그 청음 실력이라는 게 참으로 안타까운 게 문제였다. 눈감고 들으면 이곳이 교회인지 절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정도였으니 동생과 나는 매번 권사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않으려 애를 썼다. 옆에 앉으면 찬송에 방해가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웃음이 터져 나와 엄마의 옆구리 공격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권사님의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말 개콘급으로 화려해서 지금도 생각만 하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알다시피 기도 시간은 정말 길고도 길다. 매주 집집마다 방문을 하는 것이니 방문하는 집의 대소사며 온 집안 식구들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축복을 내리느라 쉽게 끝나질 않았다. 식구 수가 많기라도 하면 기도 시간은 조는 시간이 되었고 졸음과의 사투에서 나를 깨우는 것은 언제나 엄마의 옆구리 공격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차라리 졸음이 오는 기도가 더 낫다는 것을. 우리의 권사님은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는 묘한 재주도 부족해 희극에서 고통을 끌어내는 신통함도 가지고 계셨다.
전지 전능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된 기도는 서론을 지나 본론으로 들어간 지 한참인데 아직 불려 나올 식구들 이름이 남았으니 여간해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졸음이 오려고 하품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데 갑자기 기도가 다른 곳으로 튀었다. 아무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작은 집 얘기를 시작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즈음 그럴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며칠 전 사촌 동생이 사고가 날뻔했고 이를 들은 동네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걱정과 위로를 전해주던 시기였다. 할머니와 친분이 있던 권사님은 우리 할머니 마음에 주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평안을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더욱이 사촌 동생이 당신의 손자와 같은 반 친구여서 더 챙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마운 마음도 모르고 하필 그놈의 이름이 발목을 잡았으니 난감할 노릇이었다. 돌림자를 쓰는 우리 사촌들은 삼 형제였고 잘못 불려지는 게 일상일 정도로 끝음절이 정말 헷갈렸다. 준석이가 준선이가 되고 준성이가 준석이가 되는 것이 다반사라 본인들도 그러려니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께 축복을 구하는 이 신성한 자리에서 그놈의 이름 때문에 오던 축복도 멈추게 생겼으니 주님께 송구스러워 애가 타신 우리 권사님께서는 기도를 잇지 못하시고 버벅버벅 헤매다 끝내 기도에서 빠져나와 다급히 외치셨다.
"아버지 하나님 작은 집 둘째 우리, 준, 준.... 그, 그게 준.... 이름이 뭐였더라?"
듣고 계시던 속장님, 권사님, 집사님은 안타까운 나머지 원망섞인 어조로 일제히 외치셨다.
어이구. 준석이, 준석이, 준석이.
"아, 그렇지. 예, 예, 아버지 하나님. 아시지요, 우리 준석이."
"그 준석이가 지난번에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게 보살펴 주신 우리 주님의 은혜 감사드립니다."
나와 동생은 이미 배를 잡고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목으로 기어 올라오는 웃음소리를 참아 넘기느라 목젖이 아팠고 뒤틀리는 배를 부여잡고 방바닥에 쓰러져 사투를 벌였다. 옆구리를 꼬집어도 몇 번을 꼬집어 댔을 엄마도 웃음 참기에 바빴고 이내 평정을 되찾고 나서는 우리 자매 옆구리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서로 웃음이 멈췄나 싶어 살짝 눈을 떴다 동생과 눈이 마주쳐 다시 터지고 쓰러지고,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한 우리는 기도가 끝났을 때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그때 처음 졸음보다 참기 힘든 것이 웃음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은 정말 눈물, 콧물, 배꼽 쏙 빼는 고문에 가까웠다. 그 여운의 강도는 여전해 지금도 가끔 이 얘기를 꺼내면 우리 자매는 쓰러진다. 이후 속회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한가. 강한 여운 때문에 중간중간 정신 잃고 피식거린 우리 삼 남매를 뺀 나머지 어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들의 페르소나에 충실했다. 무사히 예배가 끝났고 다과 시간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화목했다. 그것이 민망할 권사님을 위한 배려이며 어른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암묵적 인정과 거래였다는 걸 알아차리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내게 이르렀고 오늘을 맞았다. 그분들 덕분에 그나마 따뜻한 애정으로 코팅된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새삼 감사하게 되는 요즘이다.
준석이, 준석이가 메아리쳤던 그 해 겨울 따뜻했던 그 안방의 온기는 유년을 넘어 중년의 지금까지 내 마음을 훈훈히 데워주고 있다. 그 준석이는 그때 권사님과 주님의 축복 덕분인지 아들 둘 아버지가 되어 늠름하게 잘 살고 있다. 그나저나 그리운 우리 권사님은 지금쯤 사랑하는 주님 곁에서 평안을 누리고 계시려나.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일까 내 유년의 한 자락을 따스한 양지로 만들어 주셨던 그 어른들이 가끔 그리워진다. 어느새 나도 그때 그분들이 했던 역할을 해내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에 뜨악하다가도 세월에 떠밀려 어느새 내 앞에 온 이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 그 온기에 보답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어쩌나. 지금 내가 나일론 신자를 넘어 무신론자 행세하며 사는 걸 아신다면 우리 권사님 크게 놀라실 텐데. "아버지 하나님 잘 아시죠. 아버지 말씀을 또박또박 잘 읽던 우리 앤을요." 하시며 내 손을 꼭 잡고 기도를 시작하실게 뻔한데.
권사님, 저는 잘 지내요.
그때도 지금도 감사합니다.
언제나 평안하세요.
"모든 바람찬 생애에도 유년의 기억만은 따뜻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 공선옥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중에서 -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