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되는 법 ​

손수건을 챙겨요.

by 하루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댓바람부터 재채기. 출근길 차 안에서 줄곧 콧물, 재채기, 코 막힘 3종 세트의 공격에 다시 하루가 시작됐음을 알게 된다. 내게는 어릴 때부터 앓아 온 지병이 있다. 타인에게 뭐 그리 대단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병은 아닐 수 있는, 알. 러. 지. 성. 비. 염. 이 어수룩한 병은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아니, 잠을 자는 동안에도 결코 한 시도 나를 떠나는 법이 없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내 생활을 지배하는 반려다. 이런 반려가 말썽 부리지 않도록 달래 가며 동행해야 하는 까닭에 작은 손수건과 부드러운 티슈는 빨강 립스틱이나 고운 파우더보다 먼저 챙겨야 하는 필수품이 됐다. 하루 종일 코를 풀고 닦아내는 통에 늘 머릿속은 안개 낀 새벽처럼 몽롱하고 아침에 한 화장을 곱게 점심 이후까지 유지하는 건 그냥 포기했다. 원인을 밝혀내기도 어려울뿐더러 혹시 알게 된다 해도 별 수가 없다. 도심 한복판 집과 사무실, 오가는 모든 거리, 식당, 지하철, 공원을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일 수도 암세포를 잘라내 듯 잘라 낼 수도 없으니. 설상가상 시시때때로 불어오는 중국 발 미세먼지로 내 호흡기의 들숨 날숨이 요사이 더 소심해졌다. 미세먼지와 카펫 털, 매연과 꽃가루, 낙엽 부스러기, 고양이 털과 섞여 하루하루 숨 쉬며 산다는 게 얼마나 성가시고 고약한 일인지. 코 막힘으로 맹 해져 늘어지는 한낮에는 이 성가신 증상이 없는 상상 속의 나를 얼짱, 몸짱인 또 다른 상상 속 나보다 더 부러워하곤 한다. 봄날 강력한 꽃가루의 공격에도 트럭 뒤꽁무니 엄청난 매연에도 아파트 경비실 앞을 알짱거리는 고양이 북실북실한 터럭에도 결코 상처받지 않는 강인한 코와 목, 폐를 가진 나라니. 상상이 쾌적하다.

영리하게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지 않음으로써 방사선 같은 강력한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악하게 덜 떨어진, 사소하디 사소한 이 병은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시급히 진압되어야 할 사건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집요하게 내 시간 전체를 갉는다. 사는 시간 전체를 관통하여 끈질기게 내가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는 동물임을 상기시키고 아직 숨 쉬고 살아 있음을 환기시킨다. 어쩌면 원래 사는 일이라는 게 완벽히 우아하고, 쾌적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함께하는 것이 끔찍하게 지긋지긋하다고, 삶이 신산스러워진 게 다 너 때문이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게 이 소극적인 병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수도 있겠다. 교만해지기 쉬운 인간에게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지병 한 두 개를 나그네 노자처럼 챙겨 준 건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존재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라는 알람일까.


제3의 침팬지를 조상으로 두고 있는 인간이 1.6%의 유전적 차이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는 얘기와 우주의 기원과 유구한 시간 속 별들의 삶과 죽음, 그 별들 가운데 푸르게 젊은 지구와 거기 존재하는 아직 어떤 대단한 발전으로도 결코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인간의 완결성에 대한 얘기들은 내 존재의 위상을 위, 아래, 위, 위, 아래로 마구 흔들어 놓는다.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위대한 완결성과 수많은 생명들 중 하나에 불과한, 우주의 티끌이 갖는 미미한 존재의 불완전성. 내 지병은 내가 그 양안에 발을 딛고 적절한 스탠스를 취하도록, 기우뚱 강물에 쳐 박혀 속절없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장치다. 장치를 인정하고 설계 의도를 파악한 후에는 이 천덕꾸러기를 잘 다뤄야 내 하루 시간의 강물이 온전히 흐르겠구나 깨닫게 된다. 무작정 내치지 말고 먼 길 기왕이면 같이 즐겁게 가보자고 어르고 달래며 하루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걸 알게 된다. 이런 우주의 계략을 알아채기까지 미련하게 돌아오긴 했지만. 밥상머리에 수저와 함께 손수건을 올려두는 걸 잊지 않는 하루. 이런 성가신 일들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짜증 내지 않는 하루. 꽃가루로 괴로워도 꽃 향기로 금세 행복해지는 하루. 이런 하루들을 보내고 나면 하루 그만큼씩은 지혜로워진 노인이 될 수 있다고 믿기로 했다. 어쩌겠는가.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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