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좀 꺼주세요.
처음 그곳에 칠흑 같은 어둠이 있었다. 해가 지고 난 후 동네는 먹을 삼킨 것처럼 까맸다. 산골의 밤은 시골집 마당에 서서 별들이 한꺼번에 돋아나는 우주에 나를 구름빵처럼 띄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집 앞 너른 밭 너머 큰 길가에 얼마 전 가로등 하나가 섰다. 그 후 큰길을 사이에 둔 우리 집과 앞집 사이 다툼이 생겼다. 어두워지면 나 다니는 이 없는 길에 무심히 떨어지는 가로등 불빛을 서로 다른 집 쪽으로 돌려놓기를 반복. 불빛을 밤새 받는 밭에 어느 작물을 심어도 부실하게 자랐으므로 아직 그 신경전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주 지방 출장이 있어 KTX를 탔다. 일을 마치고 서울 오는 기차 안에서 떨어지는 해를 봤다. 기차 유리창 너머 마을에서 하나 둘 불빛이 돋는다. 멀리서 불빛이 돋을수록 기차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또렷해진다. 어둠은 내리면서 밖과 안을 나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 빛의 분포가 뒤바뀌며 서로 낯설어진다. 환해진 기차 안 까만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해가 남아 있을 때 밖에 보이는 것들에 한 눈 파느라 보지 못한 얼굴. 낯설다. 먼 불빛이 만드는 동그란 얼룩들을 배경에 두고 유령처럼 떠 있는 얼굴. 그리다 말고 번져버린 수채화 같이 애매하다. 터널 안으로 기차가 빠져 들어간다. 점점이 보이던 먼 불빛마저 사라졌다. 인공조명 속 기차 안은 환상 속에 부유하는 4차원 공간처럼 창백하고 더 까매진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은 어색하게 굳어있다.
여기 불 좀 꺼주세요. 제발 불을 꺼 주었으면. 목이 마를 때 물이 필요한 것처럼 까만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 때 칠흑 같은 어둠이 필요하다. 나도 우리 집 앞 밭에서 크는 고추 같다. 완벽한 어둠은 나를 투명하게 만든다. 투명해진 나는 더 또렷해진다. 투명하게 또렷해진 나를 내가 훔쳐본다. 어둠이 통과한 나는 투명해져 잘 보인다. 아이는 해를 받으며 쑥쑥 자라지만 어른은 어둠 속에서 투명해진 자기 모습을 훔쳐본 후에 겨우겨우 자란다. 창백한 불빛을 채운 KTX 밤 열차 안에서 우리 집 밭 고추 상추 고구마 감자가 밤새 켜진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왜 잘 자라지 않는지 그 괴로움을 알았다. 한 밤중에는 가로등을 어떻게든 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