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단상

그런대로 괜찮아요

by 하루

새해 이런저런 기록을 다시 새로 시작해 보자 심기일전하며 수첩을 찾는다. 언제부터인지 새해를 맞아 새 수첩을 사지 않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수첩 몇 개를 꺼내 들춰본다. 회사 이름이 박힌 세상 밋밋한 진청색 수첩, 딸아이가 쓰다 만 표지에 2020년이라 인쇄된 학교 수첩, 어느 해인가 친구가 선물해 준 손바닥만 한 귀엽고 하얀 몰스킨, Le Petit Prince라고 적힌 어린 왕자 수첩, 들고 다니며 스케치를 해 보겠다 야무진 결심 후 샀던 물음표 하나 중앙에 박힌 빨간 표지 스케치북 겸 수첩. 구석구석 더 찾아보면 지금 나열한 수첩들보다 더 많은 오래된 수첩들을 발견하게 되겠지만 이거면 족하다. 우선 보이는 대로 이 중에 골라보기로 한다.


빨간 표지를 넘기니, 첫 장에 2012년 1.1 일요일(새해 첫날 새벽 3시 안 오는 잠을 청하는 대신 궁여지책으로 글을 쓴다는 내용), 2012. 1.2 월요일 춥다 -10(체해서 몸도 기분도 안 좋은, 시간의 밀도가 엉성한 하루라는 내용) 별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의 단상. 작심 3일도 못 간 딱 이틀 치 일기가 딱 한 페이지에 쓰여있다. 어린 왕자를 펼치니 weekly plan 첫 페이지에 딸아이 필체로 1月3日/ Start. 20만 원+4만 원/ 환전 30만 원/ 1,004,740원 NH 농협/ 이렇게 4줄. 몰스킨엔 띄엄띄엄 제법 기록이 있다. 광저우 출장 앨리스에게 연락할 것. 화장실에서 밖을 볼 수 있도록. 기관지 내 조직검사. "이덕무 일상을 견뎌내는 위대함". 바츨라프 니진스키 무용수.. 맥락 없는 메모들이 계통이 없다. 회사 수첩은 해가 지나 여분으로 남은 거라 비어 있고, 딸아이 학교 수첩 3,4,5월 Monthly Plan 칸엔 첫 학기 강의 제목들이 가지런히 들어앉았다.


이 중고 수첩들은 오히려 채워진 것이 거의 없어 오랜 시간 여러 번의 정리에도 살아남았으리라. 드디어 4년 동안 잠자던 수첩은 독서장으로, 10년은 됨직한(2014년 메모가 있다.) 몰스킨은 쓰이던 대로마저 메모장으로 써야겠다 정한다. 나머지는 다시 책장에 꽂힌다. 수첩이 책장에서 잠자던 사이 대부분의 메모를 스마트폰에 하게 되었지만, 종이 위에 글씨를 쓰고 시간이 흘러 그 종이 위 글들을 생경하게 읽게 될 때 휴대폰 화면의 글씨를 볼 때와는 다른 결의 생각이 들어서기도 한다. 그 종이 조각들은 분명 내가 살아 낸 삶의 한 조각일 텐데 마치 육체를 떠난 영혼이 육체를 내려 보듯 내 삶과 떨어져 그 순간을 엿보는 기분이 든다.


중고 수첩에 메모를 시작하며 이전 기록들이 적힌 페이지들을 칼로 깔끔하게 잘라 낼까 하다 그냥 놔두었다. 개인사의 지층 사이사이 화석처럼 삶을 증언하는 기록들을 안고 나머지 빈 종이를 채워가면 무슨 문제가 될까 싶다. 몇 년 전 어느 날 현장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세부 협의들이나, 딸아이의 첫 학기 흥미로운 강의 제목들, 매일의 일상을 견디며 끄적이던 노래들이 잊히고 버려져야 할 기록들은 아닌 까닭에. 오래된 수첩들, 일기장들을 들추다 보면 종종 감추고 싶은, 지워버리고 싶은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하지만 짜증 나고 부끄럽고, 아프고 안타까운 시간을 다 지우고 매끄럽고 반짝이던 순간만 남겨 두는 건 엄청난 기회를 포기하는 거란 생각이 든다. 어렵사리 나를 통과해 간 시간의 무늬들을 고스란히 새긴 복제 불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기회를.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바뀌는 핵심은 울퉁불퉁함에 있다.


여전히 대체로 지루하거나 신산스럽고 아주 드물게 아름다운 삶의 고랑을 지난다. 그 고랑 사이사이 삶이 순간 그 장려한 모습을 드러냈나 싶다가도 금세 다시 종적을 감춘다.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얼마나 살아봐야 알까요." 노래하지만, 글쎄 결코 그때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인생이라 더욱 아름답죠".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삶의 아름다움을 느껴볼 겨를도 없이 시간의 인플레이션에 점점 가속도가 붙는 요즘 그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묘책이 필요하다. 예리하고 끈질긴 관찰. 시간을 붙잡아 두는 실행 가능한 방법 하나. 그 관찰의 내용을 적어 두는 것. 그렇게 적어가다 보면 시간은 좀 천천히 흐르고 "그런대로 괜찮아요" 노래할 때가 있지 않을까. 옛 수첩의 기록들을 보니 그때도 그런대로 괜찮았었다고, 그 걸 읽고 있는 지금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심지어 때때로 삶이 어처구니없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고 그렇게 노래할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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