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유실

오늘의 단어

by 하루

언어가 숨는다. 숨바꼭질이 잦아진다. 점점 상황에 들어맞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아진다. 인터넷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반나절이나 가끔 하루 이틀 지나 기억 저편에서 문득 떠올라 반갑기도 당황스럽기도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그리 어려운 단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아닌데 어쩌다 안성맞춤인 딱 그 낱말이 혀끝을 맴돌 뿐 자력으로 꺼내지 질 않는다. 같이 대화를 나누던 옆사람에게 "그런 걸 뭐라고 하지? 이럴 때 쓰는 말, 그 단어 그거.." 그리곤 길게 돌아 돌아 설명을 한다. 그럼 겨우 옆에서 힌트를 준다. 점점 모국어를 하는 데도 외국어를 하듯 언어생활이 단순해진다. 그렇다고 생각이 단순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생각은 간단해지지 않고 그럴수록 말과 글은 미묘함, 정교함을 필요로 하는 데 표현 수단인 언어는 점점 접속이 어려워지니 이상과 현실 그 간격은 계속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적지 않은 시간 읽은 것들도 있고 들은 풍월도 있으니 그것들이 쌓여 재료가 되었다면 더 풍성해져야 되는 내 언어의 장들은 어째 좀처럼 확장되지 못하고 오히려 쪼그라들고 있다고 느껴진다. 뇌 속에 먹이를 계속 넣어도 수축된 뇌는 그 걸 양분으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뱉어 내거나 다 배설해 버려서 남는 게 없는 듯싶기도 하다. 어쩌다 모국어의 화려한 향연으로 감탄스러운 문학 작품을 읽거나 도도한 강물처럼 막힘없이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내어 놓는 연사의 말을 듣고 있자면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면 의기소침의 정도만큼 과도하고 급작스럽게 수첩에 "오늘의 단어" 같은 게 며칠 적히기도 한다. 하지만 내 머릿속 단어의 대량 유실을 막을 만큼 치열하거나 지속적이지 못한 궁여지책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간헐적으로 반복하다 슬며시 사라진다.


급기야 혹시 뇌가 줄어든 건 아닌 지 실재 뇌에 무슨 이상은 없는지 노파심이 들어 뇌검사를 했더랬다. 다행히 아직은 빈 공간 없이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다니 쪼그라드는 뇌 상상은 그만두어야 한다. 입력과 출력은 엄연히 다른 기능인데 그만큼 입력했으면 출력은 반자동으로 나와줘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희망을 품었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물론 입력 양이 많아지면 출력의 질이 좋아질 확률이 올라가겠지만 출력하지 않으면 그 가능성이 무소용이다. 진실은 단어의 유실이 아니라 생각의 유실일지 모른다. 타인의 생각이 담긴 매끄러운 말과 글을 부러워하며 질투하다가 정작 내 말과 내 글로 표현할 내 생각을 잃어버린 건 아닐지. 투박하고 울퉁불퉁하지만 내 생각을 출력하는 내 삶의 시간을 사는 일에 좀 더 매달려 봐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완전히 독자적인 생각이 있을 수나 있나. 긴 세월 그 수많은 철학자들 사상가들 작가들이 이미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있기나 할까.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이 매일의 삶에서 오래되고 깊은 생각들의 우물 속에 두레박을 던져 내가 길어 올리고 싶은 게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걸, 길어 올리지 않으면 그저 우물 속에 담긴 물일 뿐 내가 마실 수 있는 물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만큼은 시간이 흘렀다. 누구누구의 말과 글을 인용하는 삶이 아닌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내 말과 글로 직접 얘기하고 그것대로 실천하며 사는 삶은 쉽지 않지만 내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드는 몇 안 되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공들여 길어 올려 마시다 보면 오래된 갈증도 사라지고 길 잃은 단어들도 내게 돌아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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