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숨결, 그리고 다시 시작된 삶

코로나, 우리가 견뎌낸 이름

by 수아롬
삶은 때때로, 가장 귀중한 교훈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준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삶에서 가장 깊은 배움은, 우리가 웃고 즐기며 편안할 때가 아니라

깊은 상처나 절망, 무너지는 순간들 속에서야 비로소 주어지더라는 걸.


어느 날, 모든 숨결이 멈춘 듯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차단되고, 남편이 중환자실에 격리되던 그때.

나는 그가 다시 살아오기를 기도하며, 무너진 마음 위에 조용히 희망을 쌓아 올렸습니다




2021년 11월.

용기 내어 꺼내 본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억이 있다.

그날은 재수생 아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던 날이었다.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버텨오던 우리는, 아이가 할머니 댁에서 출발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119를 불렀고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혹여나 코로나 접촉자로 분류되어 시험에 피해를 주진 않을까, 그로 인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진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산소마스크 없이는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위중한 상태였음에도, 남편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시험일까지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해, 미련스럽도록 그렇게 버텨냈다.

코로나라는 낯선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루어졌던 너무나도 엄격한 격리 조치로 인한 선택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가슴 아픈 판단이었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후회로 남아 있다.


앰뷸런스는 세상을 찢듯 울부짖으며 빠르게 달려갔지만, 내게는 그 속도가 한없이 더디게 느껴졌다.

너무도 답답하고 막막한 순간. 받아주는 병원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것이 그 시절의 기막힌 현실이었다.

나는 숨이 차서 고통스러워하던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위로해 주며 괜찮을 거라고, 곧 나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무서웠다.

진짜 너무 무서워서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었다.


응급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원망스러운 분노

응급실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한 결과, 남편의 폐는 이미 하얗게 변해 있었고,

곧장 격리 병동으로 옮겨졌다.

본능적으로 이 사람과 떨어지면 안 된다고 느꼈다. 죽어도 좋으니 곁에서 보살피게 해달라고 필사적으로 애원하고 싶었지만, 나 역시 의료인 가족으로서 그러면 안 된다는 경계와 원칙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머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쉽게 나갈 수도 없게 만든 그 고약한 공간에서,
나는 온갖 검사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귀가를 허락받았다.

아득한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해가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2주 격리 대상’이라는 조치를 받고 병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남편을 혼자 남겨두고 와야 한다는 현실은 숨 막히게 고통스러웠다.

혹여 상태가 더 나빠져서, 그가 나를 간절히 찾는 순간이 와도 내가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거대한 콘크리트 병원 건물을 등진 채, 뜨겁고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앞이 흐려지고, 아프도록 주먹을 꽉 쥔 채 온몸을 떨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는 너무 힘들 텐데, 더 나빠질 수도 있는데, 숨이 안 쉬어진다고 많이 무서워했는데...’

애써 미소 지어주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더 미어졌다.

곁에 있는 것은커녕, 면회조차 금지된 채,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야 하는 차갑고 냉정한 통제가 참을 수 없이 원망스러웠다.


숨 막히는 고통, 끝없는 불안, 스며드는 체념

입원 후 남편의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숨이 차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고, 결국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그 시절 병원은 이미 아비규환 상태였다. 급속히 퍼지는 강력한 변이 바이러스로 중증 환자가 넘쳐났고, 부족한 병상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명이 생을 마감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혼란만이 가득했다.

그 와중에 그와 연락이 닿지 않자 불안은 절망으로 변했고, 애가 타서 가슴이 다 녹아버리는 것만 같았다.

지인들이 어렵게 남편의 상태를 알아봐 주었지만, 돌아오는 소식들은 퇴원이 어려울 것만 같음을 느끼게 했고 차오르는 마음의 고통은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었다.


나는 모든 존재에게 기도했다.

그 어디에라도 닿을까 하는 마음으로 제발, 제발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은 점점 더 선명하게 다가왔고, 극한의 불안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지자 무력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나를 완전히 휘감았다.

그렇게 내 마음은 차츰 ‘죽음’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각자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시간 동안

남편은 그가 있는 공간에서,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 서로 견디기 힘든 공포와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것은 오롯이 '각자의 몫'이었다.


강제퇴원, 무너진 남편

죽음을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되어, 기적적으로 남편의 폐가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러나 회복의 기쁨도 잠시, 밀려드는 환자들로 입원가능일이 정해져 있었고 강제퇴원은 불가피했다.

남편은 병원 밖으로 나가면 죽고 말 것이라며 두려움에 떨었지만, 나는 그저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하지만 병원에서 마주한 남편은 내가 알던,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던 남자가 아니었다. 쫓겨 나와 다시 입원할 곳을 찾느라 이성을 잃었고, 나는 최악의 전염병 앞에 그럴 수 없음을 설득해야만 했다.

결국, 남편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집뿐이었다. 포기한 듯한 그를 보며 결심했다.

내가 기필코 살려내겠다고...


숨은 쉬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멎어 있었다

돌아온 남편은 더 이상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코로나가 몸만 망친 게 아니라, 뇌의 일부를 갉아먹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흐릿했고 겁이 날 정도록 약해져 있었다.

말도, 행동도, 눈빛도 낯설었다.

이대로 조금씩 더 나빠져서 어느 날 죽고 말 거라고 포기하는 그를 나아질 거라고 내가 지켜줄 거라고 끊임없이 달래고 안심시켜야만 했다.

바위 같던 존재가 무너져 돌아온 모습은 고스란히 통증으로 밀려왔지만, 나를 돌볼 틈이 없었다.

모두 삼켜내야만 했다.


호흡에 대한 공포심으로 잠들지 못하는 남편을 어린아이처럼 재우고 먹이며 돌보았다.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걸음마시키듯 함께 걷고, 이야기도 나누며 곁을 지켰다.

그렇게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회복을 했고, 우리는 마주 보며 가끔씩 미소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말했다.

“격리실에서 삶의 허무, 억울함, 극한의 고통을 다 마주했어.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삶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지. 이렇게 여기서 죽는 건가...

살아서 나간다면, 나를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었어.”

그토록 달려온 인생에 배신당한 듯한 마음, 스스로 불쌍하고 후회스러운 감정 속에서 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며 살겠노라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과연 그렇게 되었을까?


후반전, 함께라서 충분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남편은 이제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

우리는 그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여전히 병을 얻었던 그 병원에서 다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변한 건 있다.

이제껏 살면서,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 해야지’라며 삶을 저울질하듯 따져오던 태도를 이제는 내려놓게 되었다.

그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은, 함께이기에 가능하고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때, ‘이제는 더 많이 나 자신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던 결심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가족뿐만 아니라, 만나는 모든 인연들의 아픔과 어려움에 마음을 기울이고,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라도 건네기 위해 애쓰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낼 수 있는 오늘이,

더욱 따뜻해진 삶이 참 고맙다.


우리는 평범하지만, 서로에게 미소 짓게 해주는
멋진 남편, 멋진 아내로

꽤 괜찮은 인생의 후반전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가 어떻게 버텼는지를 안다

병원 일을 하다 보면, 몇 년에 한 번씩 새로운 바이러스로 공포의 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2003년 사스, 2015년 메르스,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전염병이 닥칠 때마다 의료 현장은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되고, 가장 마지막까지 피할 곳이 없다.

사스 때는 생소한 바이러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컸다.

메르스가 왔을 때는 병원 내 감염이 현실이 되어, 마스크 너머로 공기가 공포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코로나19 시절,

병원은 치료의 공간을 넘어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전장이 되었다.

온몸을 감싸는 몇 겹의 방호복을 입어야 했고, 기본적인 마스크, 알코올, 장갑조차 구하기 힘들어 새벽부터 제조 공장을 찾아다니며 마지막 남은 물품을 사정해 가며 구해와야 했다.


환자들의 눈빛에는 공포가 가득했고, 누군가 기침이라도 하면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인간의 바닥을 마주해야 했던 날들이었다.

확진자가 발생하면, 지침에 따라 몇 시간이고 다녀갔던 환자의 동선을 추적하고, 접촉자를 구분해 격리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병원은 수시로 폐쇄되었고, 모든 공간을 소독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재앙이 실제로 우리에게 닥쳐 일어나고 있었다.

긴 시간, 침묵 뒤로 쌓인 말들, 눈빛 속에 담긴 날 선 감정 속에서 사람들의 이기심은 증폭되었고, 그 사나운 기운들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와 박혔다.


가까운 의사 선생님 중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

후유증으로 병원을 접고 긴 시간 쉼에 들어간 분도 계셨다.

방호복을 입고 공포와 마주하며 진료를 하는 남편을 바라볼 때마다 그가 단순히 ‘직업’이 아닌 '사명'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 역시 감염에 가장 노출되는 위험한 자리에서, 어린 동료들과 함께 자리를 지켜야 했다.


많은 이들이 ‘병원을 한다’고 하면 부러워하지만, 그 안에는 이렇듯 지속되는 고통과 두려움, 끊임없는 책임이 존재한다.

지금도 생각한다.

그 참혹하고 아득했던 시간 동안, 무너지는 마음과 불안을 어떻게 버텼을까.

하지만 남편은 묵묵히,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남기고 있다.


누구 하나 울 시간조차 없었던 날들,

몸도 마음도 다 닳아가는데,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애쓴 이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내 남편이 그중에 하나였다는 걸.




살면서 평안하고 좋은 일들만 가득하면 참 좋겠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의 여정 속에는 누구에게나 고난과 힘든 시간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그것도 늘 예고도 없이, 아주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그럴 땐 누구나 두렵다.
감당이 안 되어 벌벌 떨리고,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힘겨울 때도 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시간도 어떻게 다 살아지더라.

그러니 언젠가 또다시 인생이 힘겹게 다가올 때가 있거든,
너무 좌절하지 말고,
그 울렁거림에 너무 흔들리지도 말고,
그저 흘러가듯 받아들이리라.


왜 하필 이 일이 내게 찾아왔는지,
내가 원했던 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원망하지 말고,
조용히, 잠시 멈춰서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분명,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이유’가 숨어 있을 것이다.


비켜 갈 수 없는 운명이라면,

그 시련을 더 나은 삶을 위한 선물이라 여기고,
스스로를 믿고,

고통을 에너지 삼아 내면의 힘을 단단히 길러 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 글을 마치며,


코로나19라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몸과 마음이 닳도록 애써온 의료진과,

그 시간을 함께 버텨준 동료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남편을 진심으로 염려하며 마음을 나눠준 소중한 친구들의 위로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끝내 우리 곁을 떠난 많은 이들의 명복을 빌며, 그분들의 삶과 이름이 잊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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