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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나 May 01. 2023

아이 몫의 어려움을 뺏지 않는 엄마

     

6학년 때 왕따를 당했다. 그때 부모님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하 기도방에서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행위로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소리를 이층집 아주머니가 들었고, 엄마에게 전한 모양이었다. 엄마는 ‘열심히 기도하네!’라며 자신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했다고 감사해했다. 엄마마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왕따보다 무서웠다.    

  

그래서 나의 아이에게 같은 상처를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왕따도, 그보다 무서운 도와줄 엄마가 없는 것 같은 기분도. 그래서 놀이터에서 ‘같이 놀자’라고 해맑게 다가서는 내 아이에게 ‘넌 빠져’라고 말하는 다른 아이를 흠씬 혼내주고 싶었다. 열세 살의 나는 힘이 없어 당했고 나를 지켜줄 엄마도 없었지만 지금 나는 어른이고 저 꼬마들을 이길 수 있고 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합리화는 빛보다 빨랐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너는 기분 괜찮아? 엄마가 얘기해줄까?” 물으면 아이는 무슨 이런 일로 호들갑이냐는 식이었다.   

   

“엄마, 그냥 다른 친구 찾으면 돼. 뭐 내가 싫은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거라며. 놀다 보면 잘 맞는 친구 또 나타나.”      


내가 아이에게 교과서처럼 읊어주던 말이었다. 사실은 나를 다독이려는 말이었지. 그 말을 아이는 새겨들었는데, 정작 나는 흘려버렸다. 아이의 말처럼 조금 놀다 보면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아까는 놀이를 거절했던 그 꼬마도 같이 놀자며 다가온다. 나였으면 ‘너 아까 나 빠지라고 했잖아. 나도 너 빠지라고 할 거야!’ 매콤하게 갚아줄 텐데 아이는 신이 나서 “그럼 다 같이 술래잡기하자!” 하고 놀이를 시작한다. 아직도 열세 살의 왕따에 머물러 있는 내 속의 아이가 멀뚱히 서서 또래들과 달려나가는 아이를 본다. 부러운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면서.      


그러나 아직도 마음 한쪽에 두려움이 자리한다. 또래끼리 기세를 다투고 줄을 세우는 행위가 특히 수컷들의 세계에서는 본능이라는 사실을 ‘책을 읽어’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불안은 내가 겪은 힘든 시간이 아이에게는 없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크기와 비례한다.


놀이터에 함께 나갈 때마다, 아이에게서 친구와 부딪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뭐라고? 누가 그랬어?’ 반응하기 전에 심호흡하고 생각한다. 아이가 겪는 고통이 나의 어두운 과거를 건드린 탓에 아이가 느끼는 어려움보다 내가 더 세게 느끼지는 않는지. 그래서 아이 몫의 어려움을 빼앗는 것은 아닌지. 아이가 스스로 감당하며 성장할 기회를 차단해버리지 않는지. 아이에게 질문하기 전에 나에게 묻는다. 아이보다 내가 먼저 단단해져야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지킬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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