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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나 Jul 27. 2023

언제 크나 했는데

아이와 지낸 시간만큼 두터워지는 '인연'

 인정하자. 나도 평범한 한국 엄마다. 아이와 나를 분리해서 보자고 노력하지만, 상황에 따라 ‘내 탓인가?’하며 자책하며 눈물짓는 엄마. ‘아이’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과 판단, 그 사람이 만나고 보고 듣는 모든 요소들보다 내가 우위에 있다는 자의식 과잉 같다가도 부모의 영향이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사실 사이에서 종종 균형을 잃는다. 8년이나 됐는데, 아니 오히려 갈수록 균형을 잃을 때 마음은 더 크게 출렁인다. 


 어제는 아이가 여름방학을 하고 처음 돌봄 교실로 등교했다. 2학년 1학기 들어 스스로 등하교, 학원 일정까지 소화했는데 이상하게 어제는 마음이 시큰거렸다. 18개월에 갑자기 어린이집에 떠밀듯 들여보낸 날도, 역병이 창궐할 때 유치원에 긴급 돌봄을 보낼 때도 이러지 않았다. 아이는 많은 일을 스스로 하면서 자신감을 자랑할 만큼 컸는데 나는 왜 이럴까. 


   어쩌면 아이와 보낸 시간이 쌓인 만큼 내가 아이를 더 아끼고 사랑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를 낳자마자 너무 사랑스러워 물고 빨고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낳은 ‘아이’이지만 내가 만난 한 ‘사람’이기도해서 각별한 인연이 되는데 시간이 필요한 공식이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우중충한 마음을 달래기도 전에 돌봄 교실 선생님께 문자가 왔다. 개인 수저를 챙겨오지 않아 학교 물품으로 대체하는데, 내일부터는 꼭 챙겨달라는 내용. 아, 이런 정신머리 하고는. 개인 수저에 물병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자를 보고 알았다. 그런데다 하교하면서 전화를 건 아이는 비가 오락가락한다며 가방을 머리에 얹고 뛰어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완벽하지도 않은데(완벽할 수도 없지 사람이) 완벽하지 못한 내 모습에 스스로 괴로워하는 나에게 벌어진 최악의 상황. 수저도 우산도 없어 당황했을 아이에게 미안하고, 뭐가 중요하다고 이것도 못 챙겼나! 스스로 참 한심스러웠다. 


 학원까지 마치고 돌아온 아이는 해맑았다.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지쳤을 뿐, 종일 벌어진 일은 이미 날아가 버렸다. 오랜만에 엄마와 자전거 모험을 하고 싶대서 아이는 자전거를, 나는 아이용 킥보드를 타고 달렸다. 작년 휴직 중일 때 아이와 자주 떠났던 자전거 모험인데 복귀하고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물론 아이가 원하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엄마가 바빠 보여서 말을 못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럴 때마다 남편은 “아홉 살 남자애는 아직 그 정도로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 서른아홉 남자도 마찬가지다”라고 뼈 때리는 말을 하지만, 이상하게 서른아홉 남자가 그렇다는 건 이해하면서도 아홉 살 남자아이는 안 그럴 것 같다. 내가 엄마라서 그렇겠지. 


 아이에게 오늘 일을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선생님 꺼 숟가락 남은 게 있대서 그거 썼는데? 내일은 잘 챙겨가지 뭐”(본인이 챙길 것도 아니면서) 세상 쿨한 녀석. 다행히 비가 조금 내려서 실내화 가방 쓰고 가도 괜찮았고 비 많이 왔으면 학교에서 빌려주는 우산 쓰면 된다고. 준비성이 약한 사람의 강점은 멘탈이 강하다는 것이라던데 이 아이가 그렇네. 나는 파워 준비형이라 어쩌다 한 번 빈틈이 생기면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데 다 살 방법이 있는 거구나 싶었다. 


 오늘 아침, 가방에 수저와 물통을 넣으면서 여기 넣었다고 말해도 거들떠보지 않던 아이는 출근하는 엄마에게 뽀뽀 공격을 해주었다. 볼에다 마구 뽀뽀를 하느라 머리를 막 흔들리는 우리만의 놀이 같은 애정 표현. 요즘 부쩍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지고 대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8년 인연만큼 더 사랑하게 됐는데, 내 손을 덜 필요로 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신호도 강해졌다. 언제 크나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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