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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Feb 13. 2023

영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이색 리뷰

우리는 각자가 서로의 별이 되어

아직은 스포 없음. 이런데도 스포가 있다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서아프리카 대서양을 지나면서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말이니까.

3~4년 전쯤에 한 번 본 이후로 두 번째로 본 셈이다.

다시 보니 안 울 줄 알았는데 역시나 눈물 한 1리터는 쏟았다. (찔찔이)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건, 보고 나서 절대 후회할 일은 없다.


아니, 무조건 봐야 한다.






자, 앞 내용은 내 관점에 대한 내용, 뒷부분은 줄거리 설명이다.
영화 해석에 내 관점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앞부분을 보면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혹여나 줄거리만을 원하신다면 조금만 뒤로 넘겨주시면 된다!


인생은 필연이다.


 스피노자는 말했다. 인생의 모든 것은 '욕망'이라고. 사람은 욕망 그 자체이고, 욕망 또한 사람 그 자체다. 욕망은 사람의 모든 행동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힘이다. 그 욕망의 방향은 사람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인생 전반에 걸쳐 달라진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은 설명할 거리조차 없고, 한 사람 안에서도 시간에 따라 다른 욕망이 작용한다는 것이 꽤 흥미로운 이야기다. (오모시로이, 영화에서 자주 쓰는 대사다)


 어린 시절 기억을 후회하는 그 어떤 감정도 스피노자에겐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그 선택을 한 이유는 그저 욕망이 간 데로 따라간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이성으로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이성으로 욕망을 억제하려는 것조차 욕망이다. 만약 억제당한 욕망이 있다면 그건 이성에게 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욕망에게 패배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성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성은 그저 욕망이 더 의미 있고 좋은 욕망이 되도록 나의 지평을 넓혀주는 조력자 역할을 할 뿐이다. 경험을 되돌아보고, 지식을 쌓으며, 인과관계를 되짚어보는 일련의 이성적 과정은 더 바람직한 욕망을 만들어준다. 그렇기에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과거의 나는 그만이 가진 협소한 지평을 갖고 전과 동일한 욕망에 이끌려서 본능적으로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피노자의 철학은 '필연의 철학'이다. 우리는 과거의 순간순간마다 욕망이 이끈 대로 살아왔다. 욕망이 이끈 대로 부모님의 말을 따르기도 했고, 욕망이 이끈 대로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으며, 욕망이 이끈 대로 친구들과 거리를 둔 채 공부에 몰두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가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이 만든 필연일 뿐이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여기에 있다.



사랑은 이유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우리 옆에 있는 이 사람은 또한 필연에 이끌려 이곳에 왔다. 멀리 있을 때는, 저 먼 과거에는 서로를 인지하지 못했지만 보이지 않는 만유인력이 서로에게 작용해서 지금 서로의 곁에 있게 된 셈이다. 그리고 나는 욕망에 의해 필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이끌린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연처럼 보이는 그것을 필연으로 만든다. 그 사람의 과거, 좋은 것, 싫은 것, 무관심한 것 그 모두를 전부 이해하려고 한다.  이해의 방향은 그 감정이나 태도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있다. 그 사람이 슬퍼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집착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 이유를 끊임없이 따라가다 문득 그 이유를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을 더욱더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이해하는 것은 원인을 파악하는 과정이자 사랑.



바람직한 사랑의 기준을 지닐 것.


 나의 사랑에 대한 지론은 이 철학에 기반한다. 무릇 언어라는 것은 모호해서 사람들의 용법 또한 천차만별이기에 거기에 휩싸인 하나의 인간은 그 언어의 의미에 대해 혼동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라는 단어 또한 그렇다. 사람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본연의 앎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랑'의 의미 또한 그 사람이 겪었던 경험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잘못된 사랑의 기준을 형성한 사람은 그 오해로부터 벗어나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이에 더해, 첫사랑이라는 것이 보통 매우 어수룩하거나 실패하기 십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 모두는 일정 부분 잘못된 사랑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후로 제대로 된 사랑에 대한 관점을 갖추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만 하는 운명이다. 어찌 됐든 우리는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바람직한 사랑의 기준을 가져야만 한다.



사랑은 만물의 근원.


 여기에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론을 추가하자면, 사랑이란 감정은 모든 다른 감정의 원천이다. 배려, 공감, 이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일견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듯한 증오, 시기, 질투 등의 부정적인 감정 또한 사랑이 가장 근본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하려고 드는 자를 증오한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독차지하는 사람을 보고 질투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준에 내가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 기준을 충족한 사람을 보며 시기한다. 결국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모든 감정들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되기에 사랑은 모든 감정의 어머니다.


 나는 스피노자라는 사람의 철학에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으므로 모든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쳐질 수 있겠으나, 그의 대표 저서인 <에티카>의 내용을 처음 접했을 때 내 뒤통수가 수십 번 흠씬 두들겨 맞은 탓에 이렇게 조그맣지만 무시할 수 없는 나만의 경험에 기반한 지평으로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영화 전체 내용에 대한 스포가 들어 있으니 조심하세요.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았다면 절대 이 글을 읽지 마세요. 제발 진심으로 부탁입니다.




2월 22일, 타카토시의 1일 차.


진짜 예쁘다

 주인공인 타카토시는 등굣길 기차 안에서 에미의 미모에 순식간에 반해 버렸다. 용기 내서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다행히 에미는 이에 응했고 벤치에 앉아 말까지 나눈다. 인생 첫 헌팅에 무사히 성공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에미의 연기였다는 것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충격을 먹게 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연기는 오로지 타카토시가 앞으로 만들어갈 추억만을 위한 배려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 품에 폭 안기고서는 못 버티겠다며 울고 불고 떼를 쓸 수도 있지만, 에미는 그러지 않았다. 단지 타카토시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쌓아갈 아름다운 추억을 위해서였다. 가슴이 미어진다.




2월 23일, 타카토시의 2일 차. (에미의 29일 차)


조정석 : 당장 이렇게 말해


타카토시와의 추억이 가득 쌓인 에미. 그리고 그런 에미를 그저 첫 데이트 상대로 보는 타카토시. 그는 느지막한 밤이 되어서야 에미에게 전화해 데이트 신청을 했다.


에미는 이때 하루종일 그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타카토시에게 당장이라도 진실을 말하고 곧장 집으로 달려가서는 타카토시가 얼마나 당황스러워할지 상상도 못 한 채 그저 품에 안겼을 것이다. 하지만 에미는 여기서도 그러지 않았다. 타카토시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2월 24일, 타카토시의 3일 차. (에미의 28일 차)


글썽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에미


이날 성공적인 데이트를 마친 타카토시는 분위기를 봐서 속전속결로 사귀자고 고백까지 해버렸다. 상당히 빠르지만 에미는 고백을 받아들였다. 사실 에미는 이미 타카토시와 사귀고 있는 사이였다. 적어도 에미 자신에게만큼은 전날까지의 타카토시가 애정 넘치는 자상한 남자친구였다.


 하지만 이 날 아침에 눈을 뜨니 벌써 둘의 사이는 연인에서 썸의 사이로 전락해 버렸다. 가슴 아프지만 에미는 그날 밤 타카토시의 고백을 받아들인다. 물론 그 고백을 받아들여도 에미 자신은 자고 일어나면 고백을 하지 않은 남남의 관계로 돌아가버리겠지만, 타카토시에게는 그게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카토시가 내뱉는 말에 결국 에미는 눈물을 터뜨리고야 만다. 나의 앞과 당신의 앞은 다르기 때문에. 당신은 앞으로 과거의 나와 행복한 추억을 나누겠지만, 나는 이미 관계의 마지막에 다다르고 있기 때문에.




3월 1일, 타카토시의 15일 차. (에미의 16일 차)


에미의 끊임없는 눈물


에미는 어리다. 타카토시와의 만남 중, 진실을 알고 있는 에미의 슬픔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에미는 견뎌야만 한다. 사랑하는 타카토시를 위해서.


이날, 에미와 타카토시는 서로에게 말을 완전히 놓기로 한다. 여태까지는 진실을 모르는 타카토시와 그것을 관조하는 에미가 서로에게 온전히 다가갈 수 없는 관계였기에 호칭 또한 일정 부분 존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날 이후, 타카토시는 에미로부터 진실을 듣게 된다. 서로에게 말을 놓는다는 것은 이와 평행하게, 서로 진실을 알고 나서 겪을 그들만이 갖는 내적인 친밀함, 진정한 사랑의 시작을 의미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에미는 전날에 이미 두 사람의 비극을 타카토시에게 말해주고 오늘에 왔자신의 과거 속에서 타카토시의 아픔과 눈물을 지켜본 에미는, 지금 보는 순진한 타카토시가 겪어야 할 미래를 알고 있기에 가슴이 아파온다. 눈물이 흐른다.






3월 2일, 타카토시의 16일 차. (에미의 15일 차)



타카토시는 언젠가는 알아야만 했다.

자신의 운명을.


 그래서 에미는 용기를 내어 진실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20살에 30일 동안밖에 만나지 못한다는 것, 사실은 우리는 서로 공유하는 추억이 없는 상태라는 것, 나의 내일과 너의 내일은 서로 반대 방향이라는 것. 


 타카토시는 충격을 먹는다. 시간 개념이 정리되지 않고, 에미와의 관계가 낯설어진다. 과거에 예지력이 아닌가 하고 느꼈던 에미의 말들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왜 에미와 자신이 이런 운명에 처해야 하는가만은 이해하지 못했다.




3월 6일, 타카토시의 20일 차. (에미의 11일 차)


타카토시 : 아이 씨, 어떡하지 이거?


 에미와 같이 놀이공원에 놀러 간 타카토시는 서로가 그날 단 하루를 제외하고는 어떤 추억도 공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미친 듯이 혼란스럽다. 아무렇지 않게 여느 연인처럼 그 순간을 즐기는 듯한 에미가 너무나도 낯설다. 에미는 대체 무엇으로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는 걸까? 이미 정해진 루틴. 정해진 계획이 있고 그저 그걸 따르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는가?


 타카토시는 낯설어진 에미에게 매정해진다. 박차고 나와 새벽녘그는 생각에 잠긴다.




3월 7일, 타카토시의 21일 차. (에미의 10일 차)


깨달음. 성장의 기점을 지나는 타카토시.


이 날은 정말 절정이다.

내가 흘린 눈물의 60%는 다 여기서 쏟았다.(600ml)


 타카토시는 친구와 달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리고 구로부터 매년 4센티씩 멀어지는 달처럼,  지금 이 순간 자신과 계속 멀어지고 있는 에미에 대해, 그리고 이런 운명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에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머릿속 '아무렇지 않지 않았던' 에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마지막 순간이라는 사실에 못 이겨 울음을 수차례 참지 못했던 에미의 모습.


 그저 즐거워 보였던 에미의 내면에 타카토시에 대한 사랑과 그로 인한 슬픔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슬픔을 거역하고 타카토시의 행복한 추억을 위해 노력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에미의 모습에는 '이기성'이 단 한 차례도 보인 적이 없다. 나와 추억을 공유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저 그 사람만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깨달은 타카토시는 집으로 곧장 달려가 에미에게 전화를 건다. 어제 이미 저질러버린 일은 과거이므로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내일의 에미가 어제의 나에게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거의 내가 그토록 미성숙했음을, 그래서 나의 모습이 그렇게 못나고 보잘것없음을 정말 부끄럽지만 한 번만 이해해줬으면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럴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수차례 스스로에게, 또 에미에게 다짐한다.


성숙한 사랑의 순간이다.


타카토시는 에미를 사랑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미성숙한 자신을 뒤로한 채, 그는 '오늘'을 살기로 하였다. (원빈 마인드)

'지금' 행복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 '지금'은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자 서로에게 평생 남을 추억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을 약 15일 간이 자신에게 둘도 없는 미래이며 그중의 하루인 오늘은 그 자체로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값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이어지는 타카토시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은 참 슬프다.

에미를 위해,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슬픔을 뒤로하고 행복해지려는 모습은 일견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우리 모두는 언젠간 서로 헤어지기 마련이기에.




3월 14일, 타카토시의 28일 차. (에미의 3일 차)


조정석 : 너 좀 바뀌었구나 오태식이?


사람의 내면이 바뀌면 눈치가 좀 없는 사람도 단숨에 알아본다.

내면의 깊은 울림은 그 사람의 표정, 행동, 말투 그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꿔주기 때문인 듯하다.


에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타카토시도 그렇다.

친구도 옆에서 그를 보고 단숨에 알아챈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을.


실제로 타카토시의 얼굴에는 여유가 흐르는 듯하다.

그 여유는 현실이 괴롭지 않아서 오는 여유가 아니다. 괴롭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자만이 보이는 여유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며 행복한 추억을 만들 수 있음을 아는 자만이 보이는 여유다.





3월 15일, 타카토시의 29일 차. (에미의 2일 차)


' 울지마! 울지마!'


타카토시는 에미를 부모님께 소개한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타카토시는 결국 그 마지막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아직 2일밖에 되지 못한 에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에미 앞에서 이런 모습은 다시 보이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죽기만큼 슬픈데 거기다 그걸 숨기지 못하는 자신을 보니 더 슬프다.


아직 깊게 공감할 수 없는 에미. 에미에겐 아직 그만한 추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타카토시의 등을 토닥여 준다.

어제 타카토시가 자신에게 연애 스토리를 신난 아이처럼 고백하는 것을 보며 타카토시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을 구해주었던 타카토시의 진심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토닥여주지 않으면 얘가 나쁜 맘먹고 어린 나를 안 구해줘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울보 타카토시.

표면적으론 아이 같지만 이 울음은 아이의 울음이 아니다.

에미를 위한 사랑에서 나오는 어른의 울음이다.

타카토시는 그래서 성숙한 자다.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눈물을 보여줄 수 있는 자는 역설적으로 매우 강한 자다.

그 슬픔을 공유할 줄 알고, 도움 받아야 할 때를 알기 때문이다.




3월 16일, 타카토시의 마지막 날. (에미의 1일 차)


둘은 하나의 생명이다.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야. 끝과 끝을 이은 원이 되어 하나로 이어지는 거야. 둘이 하나의 생명인 거야."


성숙한 타카토시에게는 앞으로 에미가 과거의 자신과 엮어나갈 인연을

행복하게 만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타카토시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20살인 미와 가지는 마지막 순간일 테지만,

앞으로도 조우할 15살, 10살, 5살의 에미가 잘 성장하는지를 지켜본다.


결국 위험에 빠진 5살의 에미를 구하고,

에미 또한 물에 빠진 5살의 타카토시를 구한다.


서로가 서로를 구했고,

그로 인해 각자가 20살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하나의 별이 되었다.






뒷이야기.


남자 주인공인 타카토시, 아주 이기적이기 그지없다. 최소한 3~4년 전 내가 봤을 때는 그러했다. 자기만 좋은 경험 다 하고 나서 아직 시작도 안 한 에미에게 다가가서는 앞으로 에미가 겪을 일들을 모두 다 내뱉는다. 하나하나 빠짐없이. 그렇게 내뱉어놓고는 그제야 후회한다.

저게 뭐야..? 아니 후회할 거면 처음부터 왜 말했어?


게다가 25살인 타카토시는 아주 당당하게 15살인 에미한테 자신이 그렸던 그림을 가져다준다.

연애는 몰라야 제맛이지 저렇게 다 알려준다고? 왜 저렇게 이기적이야?


그래서 과거의 나는 그저 타카토시만이 약 15일 간이라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던 이기적인 사람이고, 에미는 그저 30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감당해 온 불쌍한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필연의 원


 카토시의 행동이 이기적이고, 그에 반해 에미가 성숙해 보인다는 점은 단지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연애 경험이 없는 타카토시. 어떤 알량한 연애스킬도 없는 순수함 그 자체다. 단지 그는 에미한테 이끌린 것이다. 망이 에미를 향해 있었던 것뿐이다.


 그러니 자기만의 천사인 에미와 함께 보낸 기쁨의 순간들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한편으론 매우 당연해 보인다. 반면에 에미는 우 이타적이고 타카토시보다는 잘 대처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에미에게도 그 모든 것이 처음 겪는 기쁨의 순간이면서 동시에 가슴 아픈 것은 매한가지다.


 다만, 타카토시가 이미 미래에 있을 모든 이야기를 다 늘어놓고 후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 점에 귀감이 되어 미래에 타카토시를 더욱 배려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결국엔 타카토시로 하여금 에미의 깊은 배려심을 느끼게 하고 더욱더 애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은 결국 5살의 에미를 구해준 성인 타카토시로 이어진다. 에미는 덕분에 세상에 남아 반대로 20살의 타카토시와 사랑을 하고 5살의 타카토시를 구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원을 그리며 이어진 셈이다.



타카토시만의 사랑의 기준


 게다가 무지에 쌓인 타카토시가 15일 동안 보냈던 연애 과정이 과연 행복했느냐 하는 것도 되짚어볼 만하다. 타카토시의 처음 15일간의 사랑은 '눈먼' 사랑에 불과했다. 타카토시는 진실을 몰랐기에 에미가 그토록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지 눈물을 자주 흘린다는 '특징'으로 치부해 버렸을 뿐이었다. 그 이면에 깔린 에미의 숭고한 배려심 또한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 이유, 다른 말로 진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카토시가 진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모든 것은 바뀐다. 그 진실은 타카토시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에미에게 괴리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현실을 수긍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 에미가 흘렸던 눈물의 이유를 깨닫자마자 '눈먼' 사랑은 진정한 사랑으로 탈바꿈한다. 타카토시는 자신이 처한 비극을 온몸을 다해 받아들였고, 그 용감함은 단순히 자신을 위한, 자신이 기쁜 사랑이 아니라 에미에게 진실되고 무한한 기쁨을 선사해 주려는 욕망을 만들어주었다. 이유를 이해함으로써 타카토시는 진정한 사랑의 기준을 만들었다.



사랑 = 아픔


 과거 타카토시가 지났던 무지의 15일은 고통이 없이 쾌락과 행복만이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눈먼 자의 아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고통 없이는 사랑이 될 수 없음에 동감할 것이다. 타카토시가 현실의 고통을 용기 있게 직면하지 않았다면 에미와 타카토시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또한, 에미도 그 고통을 오롯이 감수하고 마지막 기차에서 마주치는 그 순간까지 배려를 거듭하였기에 서로의 사랑이 완성된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모든 감정의 원천은 사랑이다. 그러니 모든 아픈 감정을 온전히 직시할 수 있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



비극이 아닌 희극


 나는 여기서 내가 앞에서 썼던 한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놓고자 한다. 나는 타카토시와 에미가 처한 이 안타까운 상황을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보고 저런 상황에 처해보라고 한다면 나서서 "저요!" 하면서 손 들고 자진 체험을 해보고 싶진 않다. 그러나, 친구가 좀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고 말을 건넬 때 타카토시가 지은 미소와 에미가 타카토시와의 첫 만남을 위해 기차를 타러 가기 전 타카토시의 자취방에 손을 얹으며 지었던 미소는 이 표현이 안일한 오판이었다고 알려주는 듯하다. 그래서 이들이 고통을 감수하면서 겪은 이 사랑 이야기는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행복한 사랑을 위해서


 이제 한 가지 결론으로 이 지난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무조건 '행복해지려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대가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한 경우가 만연하다. 여기서 자기만의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경우는 무릇 그 행복을 '쾌락'과 비슷한 의미로 귀결시킨다. 단지 기뻐야 하고, 기분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확행'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과연 에미와 타카토시처럼 고통을 직면할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다소 회의적이다. 행복을 목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행복이라는 정의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그때는 그 안에 '사랑'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는 '고통' 또한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런 정의를 내리기는 싫은데 '행복하기 위하여'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역설적으로 그 목적은 그 사람을 행복으로 인도해 줄 수 없다.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 속의 저들처럼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파오는 그런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물러서려고 해서는 안된다. 내 손끝과 발끝까지 내 몸의 모든 오감을 통해 그 아픔과 시련의 빗물을 오롯이 받아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사랑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만의 희극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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