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반년을 동고동락했다.
오랜만에 인물 사진을 찍게 되어 정신이 없었나 보다.
'렌즈는 다 챙겼는데, 아 맞다! 필름 카메라를 내가 왜 안 챙겼지?'
나는 빠진 것을 확인하다 제 때 나갈 시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부랴 부랴 차에 타서는, 안전벨트를 하고서 문자를 보냈다.
'뭐 챙긴다고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ㅠㅠㅠㅠ 미안ㅠㅠㅠㅠ'
칼답이 왔다. '괜찮아유ㅋㅋㅋ조심해서 천천히 오세유ㅋㅋㅋㅋ'
다행히도 10분 늦을 거 5분 늦게 도착하긴 했다. 나는 서 있는 욱이 쪽으로 천천히 바퀴를 굴려 다가갔다. 나는 그를 차에 태워 1시간 거리에 있는 수목원으로 향했다. 우리는 안부 인사를 나눴다. 그간 잘 지냈냐며, 요즘은 안 바쁘냐며. 한글날이 금요일이라 좋다며, 오늘 날이 흐릴 줄 알았는데 쨍쨍해서 기분 좋다며, 그리고 나중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욱이를 알게 된 건 올해 1월, 그리 춥지 않던 겨울이었다.
그는 신규 임용된 젊은 친구로, 우리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잘 다린 정장을 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넘기고서는, 보는 사람들에게마다 꾸벅, 90도 인사를 하고 다녔다. 마침 팀을 바꿔 책상 정리를 하던 나는 욱이가 사무실을 돌고 돌아 내 자리 즈음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하고 팀장님에게 욱이를 데리고 갔다. 욱이는 더욱더 허리를 굽혔다.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막내를 벗어났다. 아니, 드디어는 아닌가? 그렇게 말하니 정이 언니, 미 언니가 핀잔을 줬다. 벗어난 지 좀 지나지 않았냐고, 어디서 어린 척을 하면서 약을 파냐고 했다. 흠, 그래.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 앉은자리가 막내 자리가 아니게 되었구나. 그런데 갓 임용된 진짜 막내랑 함께 일을 하게 되다니. 꽤 신기하였다.
욱이와 나. 우리는 우연으로 만나 반년을 동고동락하였다.
내가 욱이의 사수였지만 그가 맡은 업무를 잘 알지는 못했기에 여기저기 물어보면서 같이 일을 했다. 아니, 같이 배웠다. 욱이의 전임자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안타깝지만 나는 욱이의 어떤 업무도 전에 해본 적이 없었다. 욱이가 불쌍한 표정을 지을 땐 같이 엑셀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내가 바쁘거나 할 땐 어느 누구에게 찾아가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를 알려주었다. 욱이의 얼굴에 미심쩍은 그늘이 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모른 척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는 파란 업무 수첩을 옆구리에 끼고 이 곳 저곳을 조심스럽게 돌아다녔다.
수목원으로 향하는 길은 시내를 빠져나오니 뻥 뚫려있었다. 오늘 한글날인데 사람들이 안 다니나?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닿아있었다. 내비게이션은 곧 안내를 종료하였다.
수목원에는 가을 색을 한껏 입은 노랗고 파란 나무들과, 옷을 갈아입지 않고 사시사철을 나는 나무들, 그리고 각종 꽃과, 열매가 풍성하게 가득 차 있었다. 욱이가 물었다. 차가 이렇게 많은데 사람들이 왜 안 보이냐고. 나는 아마 잔디밭에 소풍 나가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해가 잘 드는 방향을 찾아 자박자박 걸었다.
"우와, 솔직히 이런 데인 줄 몰랐어요! 규모가 있네요."
욱이는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서울에서 내려오면 많이 힘들다던데 괜찮냐는 질문에 욱이는 늘 그렇듯 양쪽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은 대답을 했다.
"음, 당연히 좋은 점도 있고 안 좋은 점도 있죠!"
햇살이 예쁘게 잘 들어오는 어느 숲에서 나는 그를 멈춰 세웠다.
자 이제, 아니 고개 좀 들지 말고. 턱만 약간 내고, 어깨 펴고. 이쪽으로 돌아볼래? 50mm 화각에 손에 익어서인지, 나는 표준줌렌즈를 쓰더라도 기가 막히게 50mm를 찾았다.
이젠 가만히 차렷 해서 고개를 아예 들어볼까? 눈 감고. 어, 좋다. 상반신을 담았다.
이제 우리는 곧 걸음을 옮겼다. 처음 사진 찍을 땐 어색해서 몸 둘 바를 모르더니, 똑똑한 욱이는 두 번만에 작가의 의도대로 척척 움직였다.
"하, 똑똑해~ 역시 신중한 외교관이야."
"또 왜 그러세요!!"
신중한 외교관은 내가 붙인 별명이다. MBTI 심리 테스트가 한창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게 뭐냐고 물어보는 욱이에게 휴대폰을 쥐어주었었다. 마침 신중한 외교관형이 나온 것을 계기로 나는 그를 놀릴거리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테스트를 하지 않아도 욱이는 신중한 청년이었다. 그는 결코 어떠한 외부의 자극에도 섣불리 반응하지 않았고, 판단을 유보하는 버릇이 있었다. 난감한 상황에서는 제 나이답지 않게 돌려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런 신규는 처음 보았다며 사람들은 감탄 반 놀림 반으로 그를 추켜세웠다.
물론 모든 감정들이 사회초년생의 말랑한 얼굴에서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반년을 옆에 있다 보니 이 친구가 말은 아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제 무슨 말을 할 건지를 나는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욱이는 언제나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신중한 청년. 내가 반년 동안 만난 욱이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내 눈에는 같은 팀 막내 직원이었기에 나는 습관적으로 요즘은 힘든 일 없는지, 괜찮은지를 한참 물었다. 나는 꼰대였다. 착한 꼰대. 욱이는 이젠 적응이 좀 되어서 괜찮다고 말해줬다. 이런 일도 있긴 한데 하고 조언을 구하면 나는 내가 아는 선에서 대답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욱이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뷰파인더에 담긴 욱이는 바라봤을 때 방향으로 왼쪽 얼굴이 잘생겼다는 것이다. 아마 본인은 알 것이다.
또한 욱이는 나랑 잘 지낸 줄 알았는데, 이동한 부서에서도 여자 선배들과 아주 잘 지내고 있었다. 후에 나와 미 언니는 그가 소위 아줌마들에게 사랑받는 스타일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게 된 것은, 오늘, 햇살이 따사로운 한글날에 오랜만에 만난 욱이는 그때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사무실을 떠나 이 곳 저곳을 다니고 있을 동안 욱이는 그 나름대로 차분히, 여러 일을 겪어내고 있었다. 욱이의 시간은 차분히 흘러가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수목원에 감탄하며, 욱이는 숲 속 여기저기를 차분히 누볐다.
"괜찮아요. 이젠 적응 다 됐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욱이는 씩 웃었다.
그래,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우리는 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