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할머니는 누구세요?

이제 포트폴리오를 시작해보자구요.

by 냥냥이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별하시면서, 자연스레 나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이혼이 흠이던 시절 어른들은 눈썹을 아래로 찡그리며 불쌍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고, 저런! 그래, 할머니랑 아빠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자라야 한다." 어른들은 내게서 1400만 개의 미래 중 문제아가 될 가능성을 멋대로 내다보았다.


나는 정말로 착하고 바르게 자랐다. 나의 어린 시절 장래희망은 군인이었다. 법과 무기로 조국을 지키고 싶었다. 교실 한편에 마련된 <나의 꿈> 보드판에 나는 파란 색지를 동그랗게 오리고는 그 위에 내 사진을 붙이고, 장래희망은 여군이라고 적어놓았다.(군인도 아닌 여군이라는 시절이 있었다.) 내 옆에는 대통령, 간호사, 연예인 등의 직업군이 오색 색종이 위에 삐뚤빼뚤 적혀있었다.


아니, 내가 지켜주고 싶은 것이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나는 우리 할머니를 지켜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니 강인하신 분이었고, 나더러 그렇게 살라면 나는 못 살겠다고 울고 불겠지만, 당시 우리 할머니는 나에게는 너무 귀여우신 분이었다. 어리고 철없는 나는 할머니한테 '귀염미 할무이'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웃으셨다.


살아계실 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못 해드린 숙숙한 손녀였지만, 나는 할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여름엔 대문 골목에 앉아 할머니와 함께 수박을 썰어먹었고, 겨울엔 이불 안에 함께 누워 안고만 있어도 너무 좋았다. 4년 전 가을 급작스럽게 돌아가실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할머니를 사랑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후 산소에 갈 때마다 나는 남편의 가슴팍에 눈물 자국을 남겼다. 남편 품에서 한참 동안 얼굴을 파묻었다가 고개를 들면 셔츠에 영문 대문자 티, 언더바, 티 형태의 자국이 남았는데, 그걸 보고 남편과 나는 까르르 웃었다.


어느 날부터 장 선생님은 재촉했다.

"포트폴리오 이제 시작하면 되는데... 아니면 이런 건 어때요?"


포트폴리오 만들어보자는 얘기는 진작부터 들었었다.

그런데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영이나 욱이 사진, 카페 사진 같은 것들을 갖고 가면 또 그다음 주고, 시간은 또 흘러갔다. 그런 나를 장 선생님은 마치 스카이다이빙 강사처럼 재촉했다. 번지점프는 책임 소재 때문에 초를 세는 방법 외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뛰어내리는 사람을 강요할 수 없다고 한다. 절대 밀어선 안된다. 그런데 스카이다이빙은 좀 다르다. 강사가 제 몸을 안전장치로 내 뒤에 단단하게 고정하면, 상공 4km 위 경비행기 입구에 앉아 눈을 뜰 수 없는 바람을 맞으며 제 발 밑에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 자각하고 'No, no, no! I can't!'을 외쳐도 강사는 제 엉덩이를 떼서 그를 허공으로 밀어뜨리는 것이다.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이 만든 포트폴리오를 여러 가지 예시로 들어주었고, 그리고 자기가 봤을 때 나에게 어울릴 만한 것도 이 것, 저 것 추천해주었다. 이런 주제는 이렇게 하면 되죠! 하며 방금 막 떠오른 생각을 말해주었다. 나는 '역시 배운 분은 다르네' 하고 심드렁하였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것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아... 나는 또, 궁금해하지 않는 버릇이 도져버렸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포트폴리오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다. 수업료를 내기 전 상담할 때 포트폴리오를 만든다고 진작에 듣지 않았던가? 그것에 동의하고 나는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오케이. 만들긴 만들어야겠구나.' 나는 첫 수업 후 석 달 반 정도가 지나서야 선생님의 말을 수용할 준비를 하였다.


나는 포트폴리오 주제를 정했다.

할머니와 나.

선생님의 조언을 받고 시작했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어쩐지 이것에 대해서는 미리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린 날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그냥, 문득.


'우리 둘이 제주도 안 갈래?'


어린 나는 입을 삐죽 내뺐다. 나는 할머니가 내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고 좋았지만 할머니는 젊지 않았다. 나는 어떠한 시선들에 굉장히 예민했다. "아이고 착하네, 효녀네." 하거나, "앞으로도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하며, 어른들은 그 주름지고 기름진 손을, 내 허락도 없이 머리에 얹었다. 나는 그런 미래가 두려웠다. 망설이고는 입을 더 삐쭉, 내고 말을 흐렸다. 그러는 사이에 결국 100만 원 상품권은 기한 초과로 버려졌다. 그 이후로 나는 할머니와 여행을 한 적이 없다. 어릴 땐 너무 철이 없고, 철이 들고 나서는 기다려주시지 않는 것이 관계의 아이러니이다.


못다 한 제주도 여행은 나의 속죄의 대상이었다.

나는 어린 나와 조금은 더 건강하고 젊었던 할머니를 불러 여행시켜 주고 싶었다. 가까운 곳부터, 할머니가 좋아하셨을 만한 곳으로 장소를 잡고는 소품을 정했다. 할머니를 위해서는 네 발 달린 지팡이와, 어린 나를 위해서는 분홍색 단화를 샀다. 그러고는 어떤 아름다운 성당으로 달려갔다.


프레임 안에서 지팡이와 신발은 나란히 성당 정문을 향해 서 있었다. 햇살을 받은 철제 지팡이가 빛났다. 어느덧 내 눈 앞의 뷰파인더가 흐려지고는, 나는 그대로 웅크리고 몸을 떨었다.


그다음 날, 나는 불국사로 향했다. 이번엔 스토리를 좀 만들어보기로 했다.


어느 사진에서는, 지팡이가 펜스에 기대 있고 신발이 자판기 앞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어느 사진에서는,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기념사진을 찍듯 지팡이와 신발이 청운교 앞에 나란히 섰다.

이런 종류의 사진을 나는 오후 내내 찍었다.


프레임 안에서 존재하였던 것은 지팡이와 신발이었다. 할머니와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꿈을 꾸는 듯 사진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다.


이 사진들을 가져간 어느 날이었다. 지팡이와 분홍색 단화는 오피스텔의 와이드 한 모니터에서 확대된 채 민망하게 떠 있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이 사진은 안돼요. 음 지팡이는, 뭐.. 아니, 지팡이도 너무... 새 거잖아요!"

나는 반박했다. "아니, 아빠가 할머니 유품을 다 버려서 없다니까요? 저도 다큐멘터리처럼 찍고 싶었어요. 근데 집도 팔고 유품도 없고 아무것도 안 남아있어요. 그래서 산 거예요."

선생님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신발은 뭐예요? 왜 지팡이 옆에 갖다 놨어요?"

나는 변명했다. "이거는 저예요. 어린 나."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 본인 신발. 그나마 다행이네." 그러고서는 덧붙였다. "욕먹어요. 야 이 사람아, 살아있을 때 잘하지! 뭐했어? 라든지." 나는 책상을 탁탁 치고 웃으며 말했다. "아, 상관없어요! 저는 효녀니까요!"


내 사진은 대차게 까였다. 파인아트는 1차원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디벨롭시키면 나중엔 오브제가 바뀐다고, 지팡이랑 신발은 나중에 안 쓸 거라고 들었다.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오늘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다.

'할머니 하면 떠오르는 것을 먼저 생각해봐요.'


사진과 글은 또 다르단다. 대상과의 관계성을 따지기 전에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먼저 설명해야 한단다. 나는 선생님에게 말하지 않았던 대주제를 떠올려보았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그리운 내 할머니'가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나는 이렇게 이기적이고, 또 못되고 철없이 굴었다. 또 나만 알지, 나는 그제야 "왜?" 하며 한 번 더 생각해야 함을 깨달았다.


할머니라는 분이 어떠한 분인지,

정말로 강인하신 분인지, 어떠한 계기가 있었는지,

좋아하던 색깔은, 음식은, 노래는,

취미는, 특기는,

할머니의 고향은 누구이며, 할머니의 엄마는 누구신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할머니의 흔적을 찾아야만 할 것 같았다.

포트폴리오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사진과 글은 다르지 않음을 곱씹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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