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지구님, 안녕하신지요.

카메라만이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는 아니다.

by 냥냥이

지난번 화이트 밸런스 이후로 한동안은 별달리 힘든 숙제는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전히 상상할 수 있는 사진을 요구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며, 학생들이 꽃의 그림자를 찍어와서는 되려 자기에게 묻는다고 말했다. 어린 학생들은 이 꽃이 무슨 색깔인지 맞혀보라고 한단다. 머리가 굳은 나는 반문했다. 네? 색깔을요? 선생님은 눈썹과 어깨를 으쓱였다.


무엇을 찍지?

그런데 그걸 왜 찍었냐고 물어볼 텐데, 나는 또 대답할 수 있을까?

어쩐지 숨이 막혀왔다. 나는 아무것도 찍지 않았다.


한편 나는 지난 7월부터 사진 수업 외에 소소한 글쓰기 모임에도 나가고 있었는데, 2주에 한 번씩 하는 이 모임도 지난번에는 같은 이유로 나가지 않았었다. 차라리 주제를 정해주지, 무제라고 하니까 도대체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하여, 밤새 고민하다 잠을 설치고는 도저히 잠을 참을 수가 없어서 갑작스러운 통보를 하곤 불참했었다. 그게 정확히 2주 전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온 단체 메시지에 나는 불안에 두근대며 주제를 물었다.편지를 쓰면 된단다.


사진이나 글이나. 나는 개학 전날까지 방학 숙제를 미뤄놓은 애처럼, 심연 같은 절대적인 존재가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정말로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차라리 물어라도 보고 싶었다. 뭐 쓰면 돼요? 뭐 찍으면 돼요? 나는 짧은 한숨을 쉬고는 정말로 집에서 모든 것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어떤 계기일지 모르는 어느 순간에 나는 찍을 거리, 쓸거리를 발견하였다. 노트북이 놓인 식탁 위에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받은 플라스틱 컵과 초록색 비닐 껍질로 둘러싸인 탄산수 몇 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조리대에는 남편이 먹다 남긴 고추냉이 맛 땅콩 봉지가 얌전히 돌돌 말린 채 누워있었고, 건강보조제가 빼곡히 담긴 플라스틱 통이 마치 새 것처럼 놓여 있었다.


문제의식이라는 것이 방금 막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곧장 작은 방의 제습함으로 달려가서 카메라를 꺼내 들고서는 플라스틱 병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아니, 이걸 주르륵 세워서 50mm로 찍어볼까? 나는 그 예비 쓰레기들을 일렬로 정렬했다.

오래되지 않은 지난 어느 날, 나는 환경이 주제라는 어떤 사진 전시회에 갔던 적이 있다. 같은 종류의 쓰레기들만 모아서 콜라주를 한 연작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 작품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도 비슷한 주제로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한 컷도 찍지 않았다.

하마터면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진을 찍을 뻔했으니.


장 선생님은 나에게 항상 예술의 시비를 가리는 것을 경계하고 주의하라고 일렀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적법성과 적절성, 그리고 정확성을 중점적으로 생각해오는 버릇을 길러왔기 때문에, 그 언젠가 선생님이 미국의 유명한 파인아트 작품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우발적인 난색을 표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이후로 예술작품에 대해서라면 일단정지, 판단을 유보하기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 하나만큼은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타인의 삶에 멋대로 망원렌즈를 200mm로, 800mm로 주밍 하면서 찰칵 셔터를 내리꽂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대개는 이런 것이었다. 저 멀리서 때 묻고 헤진 캡 모자를 쓰고, 낡아빠진 러닝셔츠를 입은 채 고물이 한가득 담긴 리어카가 지나가고 있으면 멀찍이 서서 망원 렌즈로 당기고는, 포토샵에서 콘트라스트 대비를 MSG처럼 치대어 '삶의 무게', '삶의 현장' 이런 식으로 제목을 단 사진. 마, 내가 이런 걸 발견했어! 마, 내가 이 정도의 문제의식이 있어! 근데 뭐?


내 앞에 놓여있는 플라스틱 쓰레기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리고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대책 없이 소비하고 있는 중이라면 함부로 카메라를 들기 전 한 번 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구에게 망원렌즈를 들이밀 수 없었다. 해수면이 상승하여 갈 곳 잃은 사람들과, 북극곰과, 멸종하는 동식물들의 삶에 멋대로 이름 붙일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방금 내가 발견한 사실들- 단지 24평 우리 집에서도 대책 없이 배출되는 쓰레기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 생각을 전달한 매체는, 적어도 지금은 카메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참석하는 글쓰기 모임은 참 건전한 곳이다. 어떤 글이라도 읽고 생각을 공유하는 장이니, 내 뜻은 어떻게든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모임의 주제가 편지였으므로 나는 지구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을 썼다.


요즘은 어딜 가나 카메라를 볼 수 있다. 굳이 DSLR이 아니라도 오히려 미러리스가 더 잘 나온다고 한다. 아니, 카메라는 고사하고라도 누구나 휴대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런데 사진은 촬영자의 생각을 담는 가장 보편적인 매개체 중 하나이다. 누군가가 카메라를 들고 풍경을 찍었다면 그 풍경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촬영자의 생각을 담은 것이다. 차량 접촉 사고 현장에서 운전자 둘이서 치고받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었다면, 이 사단이 제보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촬영자가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드는 것은 조금 더 신중해야 한다. 사진을 찍기 전 한 번만 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카메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타인의 삶에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폭력 같은 지레짐작과 허풍, 간섭을 하지 않도록.


글쓰기 모임에 오늘은 제시간에 맞춰 갔다.

나는 지구에게 보내고 싶은 편지를 모두 앞에서 낭독했다. 무분별하게 배출되는 쓰레기 문제에 모두가 공감했다. 누군가는 운동 중의 가장 어려운 운동은 환경운동이라며,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을 하더라도 쓰레기가 배출되어 눈 앞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버리면 경각심이 줄어드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는 어떤 이는 요즘은 카페들이 자연 분해 소재의 컵을 많이 사용한다고, 이미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네들의 열띤 반응에 힘입어 이제 막 키우기 시작한 작은 소셜네트워크 페이지에도 같은 글을 실었다. 의외로 내 글은 비슷한 포인트에서 공감받았다.


나는 기뻤다.

처음 시도대로 사진을 찍었다면 나는 내 생각을 창의적이면서 나이스한 방식으로 공유할 수 있었을까?


한편으로는 또 헷갈린다.

내가 싫어한다고 밝힌 부류의 사진- '삶의 무게', '삶의 현장' 같은 것들이 정말로 작가의 진정성을 표현한 사진이라면? 그래서 몇 년 몇 날동안 그런 사진만 쭈욱 찍어왔다면 그 작가의 진정성에 대해서 나는 쉽사리 의심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글 하나에 결론 나지 않을 질문을 나는 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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