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너의 진짜 얼굴을 보여줘.

영이의 두 눈은 추위로 얼어붙고 말았다.

by 냥냥이

나는 오랜만에 영이를 만났다. 오늘따라 영이는 즐거워 보였다. 친구가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출사를 간다 하면 언제부터인지 영이는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나도 매번 늦는 영이를 기다리다 보니 피곤해졌다. 영이와 나는 서로 각자의 고민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인물사진을 더 연습해보고 싶은데 피사체가 둘 이상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고, 영이는 하루 종일 비슷한 포즈를 잡는 날이 반복되다 보니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여, 나는 줄기차게 영이를 꼬셨다. 친구 한 명 데리고 오라고.


나는 영이와 영이 친구 서나를 출사지까지 편안하게 모셨다.

나는 두 걸들을 위해 토끼 모양, 곰돌이 모양 머리띠, 사랑스러운 화관, 그리고 한 번도 읽지 않은 채 책장에 짱박아두었던 빨간 양장본 셜록홈스 소설을 소품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저런 소셜네트워크용 소품들은 오늘의 메인 요리가 아니었다.

나는 오늘 실험을 위해 스카프와 붕대, 그리고 전날 사서 잘라놓은 조화를 준비해두었다. 물론 민원 발생 예방차 미리 알려두긴 했다.


'사진 이제 너무 잘 찍으세요. 근데... 너무 안전빵으로 가시는 거 아닌가요.'


사진을 배운 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왜?"를 묻지 않는 버릇이 도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쯤, 눈치 빠른 장 선생이 먼저 선수를 쳤던 것이다. 그는 내게 말했다. "사진에 애착을 가지는 걸 주의하세요. 그리고 정말로 이 것 저 것 해보셔야 해요." 그는 영이가 핑크뮬리 사이에서 하얀 카메라를 들고 웃고 있는 사진을 콕 찍었다. "특히 이거 보세요, 이런 사진. 다른 학생들 같았으면, 핑크뮬리에 데려다 놨으면 그 안에서 온갖 짓을 다 했을 거예요. 이건 너무 단정하잖아요. 저는 정말로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선생은 내게 안주하지 말라고 했다. 어느샌가 나의 사진이 인기에 영합할 수 있도록, 타인들이 나를 쉽게 수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의 능력치를 배양하고 있음을, 나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선생은 귀신같은 눈썰미로 발견하였던 것이다.


나는 갈대밭에 선 두 걸들을, 준비한 소품과 햇살을 가지고 치장했다. 영이와 서나는 예쁘게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웃었다. 빨간 책을 같이 보라고 쥐어주니 저들끼리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마침 머리카락은 바람에 하늘하늘 나풀거렸다. 어린 여인들은 조신하게 웃었다.


그 뒤 우리는 해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쁜 사진은 이제 다 찍었으니, 나는 내 할 일을 할 참이었다. 그런데 영이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아프냐고 묻자 영이는 괜찮다며 상체를 감싸 안았다. 나는 입고 있던 얇은 패딩 조끼를 벗어 괜찮다고 손사래 치는 영이에게 억지로 입혔다. 4시의 햇살에 더울 것 같아서 차 안에 코트를 벗어두었는데, 석양 시간에 다가올수록 저 자비 없는 바랏 바람에 얇디얇은 영이의 옷차림으로는 무리였던 것이다. 영이의 진줏빛 블라우스가 바람에 어쩔 도리 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준비한 물건들을 꺼냈다.


'붕대랑 꽃? 이유는 뭐죠?'

'이유는 없어요. 그냥 해보고 싶었어요.'

'음, 그럼 85mm로 담아보세요.'


"서, 선배... 이제 집에 가면 안 돼요?" 영이는 이 사이로 스읍, 스읍 쇳소리를 냈다.

응, 아직 안돼. 미안. 영이의 눈 위로 붕대를 칭칭 참고는, 잘라놓았던 꽃줄기들을 곳곳에 꽂았다. 서나가 실핀을 고정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영이는 지금 뭐하는지 안 보인다고 중얼거렸고 나는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서나와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 영이를 끌고 한 발, 한 발 물가로 데려갔다.


줄기가 나풀거리는 연약한 꽃- 브러싱 브라이드, 스위트피, 그리고 나른함을 잡아주기 위해 꽂아두었던 화형이 납작하고 단단한 장미가 영이의 머리 위에서 날렸다. 표정 없는 영이는 석양과 바람을 등지고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영이를 여러 각도에서 담았다. 창백한 꽃들이 붉은 석양 앞에서 흔들리며 춤을 추었다. 저가 흔들리는 건 제 의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영이는 말이 없었다. 표정도 없었다. 충분히 담았을 때 즈음, 서나와 나는 영이의 얼굴에서 소품들을 떼어내었다.


"선배... 진짜 이제 집에 가면 안 돼요???"

미안, 조금만 더 참아. 영이의 얼굴은 추위로 경직되어 있었다. 머리는 소품들의 자국으로 한껏 헝클어져 있었고, 입술은 달달 떨렸으며, 두 눈은 추위에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그런 영이에게 스카프를 쥐어주었다. "이거 잡고 가볍게 당겨." 그러고는 서나에게 스카프의 끝을 잡으라고 한 뒤, 포커스를 카메라 바로 앞에 있는 스카프 너머 영이의 얼굴에 두었다. 삐빅, 철컥. 삐빅, 철컥. 퍼덕퍼덕 둔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스카프와, 그것을 여력 없이 잡고 있는 영이를 모두 담았다. 나는 패딩 조끼를 얼른 영이에게 덮어주었다.


나는 집에서 오늘의 결과물을 열어보았다.

갈대밭에서 영이는 예뻤다. 애교살이 도톰한 동그란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났으며, 보조개가 오롯이 떠 있는 미소는 방긋방긋 싱그러웠다. 여름부터 여태껏 담아온 영이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나는 바다 사진도 열어보았다. 영이의 표정이 많이 좋지 않았다. 입술은 파랗고 눈은 공허해져 있었다. 아마도 그는 이런 사진은 싫다고 할 것이다.


"음..."

나는 묘한 기류에 쌓였다.

다시 갈대 사진으로 돌아가 영이를 살펴보았다. 내가 여태껏 담았던 영이의 모습이었다.

나는 마우스를 확 끌어 다시 바다 사진을 보았다. 어쩐지, 영이의 두 눈은 보면 볼수록 텅 비어 보였다.


'아, 그렇구나.' 방금 알았다. 내가 영이만 만나면 착하고 뻔한 사진만 찍어왔던 이유. 나는 계약 이행에 아주 충실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여름에 우연히 만나 사진 메이트가 된 영이에게 미안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예쁜 모습을 담아주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아주 충실하게 그 약속을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약속의 이행에는 몇 가지 현실적인 이점도 있었다. 소셜네트워크에는 영이의 사진에 가장 많은 하트와 찬사가 달렸다. 나를 팔로우하는 사람도 늘었다. 그래서 난 참 안전한 선택을 했던 것이었다.


나는 스카프가 나부끼는 가운데서 찍은 영이의 사진을 크게 띄웠다.

반쯤은 가려진 얼굴은 눈 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차갑게 푸르고도 붉었으며, 영이는 공허한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지금 나는 지금 영이의 살아있는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 언젠가 어떤 스릴러물 영화의 시사회장에서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벽지에만 수천만 원을 썼다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배우들을 몰입하기 위해 그 정도까지 투자했다는 그의 말을 나는 당시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것 같았다. 여태까지의 착하고 어긋나지 않아 예쁜 사진은,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영이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영이는 앞으로 더 피곤하겠지만 나는 이제부터 영이가 너무나도 보고 싶을 예정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는 오래, 많이 스케치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늦더라도 여유롭게 기다릴 것이다. 그러고는 최대한 나의 의도를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촬영은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할 것이다.


사진을 띄워놓고 보다가, 남편이 지나가자 나는 물었다.

"여보, 이 사진 표정 어때요?"

남편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모델들이 저런 표정 짓잖아요."


살아있는 감각을 물 밑에서 건져 올리는 묘미를 알게 된 이상, 예전의 착하고 평범한 사진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을 나는 방금 직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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