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쓴 드라마 <또!오해영>에 대한 리뷰입니다.
<또!오해영>은 힘이 세다. 두 달 동안 책 한자 안 읽고, 글 한꼭지 안 쓰고 드라마만 봤다. 집에 TV도 없는 내가 다시보기나 다운로드 받아서 악착같이 봤다. 여러번 봤다. 그것도 로맨틱코미디를. 나이 40넘어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인터넷 뒤져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더만. 전날 방송을 무한 반복해 시청하며 울고 웃다가, 관련 기사 새로 올라온 게 없는지 미친 듯이 검색한 후, 블로그 리뷰들을 함께 읽으며 격하게 공감댓글을 날리는 수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래, 내가 이상한 건 아니었어. 그리고 글이 쓰고 싶어졌다. 드라마를 보고 처음으로. <또!오해영>은 힘이 세다.
<또!오해영>은 대본 훌륭하고, 연출 좋고, 촬영 아름답다. 그렇지만 결국 게임은 선수들이 하는 것. 그래서 이 드라마를 이야기하며 배우들의 연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주조연 가리지 않고 소모되는 캐릭터없이 연기를 참들 잘하신다. 어릴 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조금씩 성장해가는 에릭의 연기도 인상적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배우를 빠뜨리고는 이야기가 안된다. 서.현.진.
평소 좋은 배우의 조건은 설득력이라고 생각해왔다. 말로든, 몸짓이로든, 눈빛으로든 그 상황을 보는 이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힘. 기본적으로 허구인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는 좋은 배우가 가져야할 당연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10년 넘게 항상 언급해온 예는 바로 <번지점프를 하다>에서의 이병헌의 연기였다(그는 이 영화에서 제자로 환생한 여자친구를 사랑하게 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을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2016년 5월 2일 이후로는 서현진, 무조건 서현진이다.
<또!오해영>이 화제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관련 기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가 바로 ‘공감’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보자. 서현진의 미모가 그냥 평범하다고?(제작진도 서현진 배우가 그냥 오해영을 맡기엔 너무 예뻐 걱정했다는 후문) 그런 그녀가 외모도 보통, 공부도 보통, 경력도 보통인 '그냥 오해영'을 연기한다는 게 사실 말이 안되지 않나.
그런데 1~2화를 보면 이 배우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제작진의 그런 우려에 우리의 서현진 배우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단호하게 말했다는 또다른 후문). 정말 우리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콤플렉스 덩어리에 좌충우돌하는 평범한 30대 직장여성인 것 같았다. 그녀가 웃고 울고 진상부리는 모든 상황들이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고, 도경의 대사처럼 짠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남자인 내가 그랬으니 2~30대의 여자분들은 말해서 뭐하랴. 정말 오랜만에 좋은 배우의 조건인 설득력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게다가 3회를 기점으로 서현진의 얼굴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 5화에서 두 번째 도움닫기 포옹에 성공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우두커니 서서 떠나는 도경의 차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라.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눈빛과 온몸으로 이야기한다. 보는 이들에 앞서 자기자신부터 설득시켜버린 모습. 이러니 시청자들의 격한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있으랴.
그녀의 연기를 보면서 배우의 기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정확한 발음과 발성. 10화 말미 큰 화제가 되었던 대리기사 씬. 마지막 모텔을 지나며 해영은 지척에 두고 온 고향을 지나쳐야 하는 실향민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 해영을 보고 도경 왈, “여자는 모텔같은데서 자는 거 아니다.”
심통난 해영 왈, “여자는 모텔같은데서 자는 거 아니면 이 쎄고 쌘 모텔 다 남자들만 들어가나 보지.”
‘여자는 모텔같은데서 자는 거 아니면 이 쎄고 쌘 모텔 다 남자만 들어가나 보지.’ 이 상당한 길이의 대사를 서현진은 강약에 포인트를 주면서 재빠르게 구슬굴리듯 처리하는데, 배우의 입에서 발화된 자음과 모음들은 통!통!통! 경쾌하게 튀면서 내 귀에 꽂히듯 박혀들어왔다. 우와~~~~~! 정확한 발음과 발성이 배우에게 얼마나 큰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었던 순간. 넘 오바하는 것 같은가. 직접 해보시라. 발음이 센다. 서현진 배우처럼 굴리듯 해보시라. 혀가 꼬인다.
이러니 서현진의 술취한 연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은 당연한 일. 상추쌈을 한 입 가득 넣고 대사를 쳐도 신기할 정도로 또렷하게 들리는데 혀 좀 꼬부린다고 안 들릴까. 그런데 원체 대사전달력이 좋다보니 평소에 말할 때와 술취한 연기를 할 때의 차이가 무지 크게 느껴진다. 게다가 그 슬랩스틱이라니. 정말 소주 세 병은 기본으로 마신 사람처럼 보인다.
이렇듯 설득력과 정확한 대사전달력이라는 무적의 쌍검을 들고 서현진은 잘 차려진 판때기 위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마음껏 뛰논다. 해영이 나오는 모든 씬들이 빛났다. 아파서 울고 있어도 눈이 부셨고, 구르고 망가져도 예뻐 보였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자신의 첫사랑처럼, 어떤 이들에겐 철없는 친구처럼, 또 누군가에겐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딸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게 두달동안 전국의 수많은 이들이 오해영에 빠져 함께 울고 웃으며, 그녀를 응원했다.
많은 이들이 서현진 배우의 몸을 사리지 않는 망가짐과 생활연기에 열광했고 나 또한 그러했지만, 내가 진정으로 좋아했던 건 그녀의 표정연기였다. 13회를 보자(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13회는 대본, 연출, 연기가 모두 완벽한 한국 로코 역사에 기리 남을만한 한 회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이 회차에서 도경이 해영에게 진심을 말하는 장면이 세 번 나온다. 이 때 해영은 대사가 없다. 오로지 표정으로만 모든 걸 말한다. 도경이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본심을 말할 때마다 미세하게 변해가는, 더 이상 이 사랑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무너져내리는 그녀의 표정연기는 단연 발군이다. 종영 후 인터뷰에서 메릴 스트립의 표정연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한 이 명민한 배우가 자신을 얼마나 끊임없이 갈고 닦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연기였다.
'그냥 버텼다.' 종영 후 인터뷰에서 그 힘들었던 10년의 세월을 현자처럼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그녀. 다른 걸 할 용기가 없었다고 하지만 그 오랜 시간을 변치않고 견디기 위해 그녀가 이겨내야했던 불면의 밤과 고통들을 어찌 쉽게 가늠할 수 있을까. 그건 진정한 용기와 결의, 인내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묘하게도 오해영의 인생과 오버랩되면서 그녀의 연기에서 느낄 수 있는 진심의 무게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린 세상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또 한 명의 자랑스런 배우를 얻었다. 그렇게 좋은 배우는 발견되고, 결국 사랑받기 마련인가 보다. 기쁜 일이다. 인터뷰 마지막, 그녀는 대중들의 폭발적인 사랑에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자신의 길을 뚝심있게 걸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피력했다. 믿음직스러웠다. 이 대기만성형의 배우가 앞으로도 ‘소현진’이라는 별명처럼 오랫동안 꾸준히 진심을 다한 연기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길 기원한다.
사진 출처 : 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