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2월 31일 오후 9시 30분 즈음이었다. 어둡고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서 유독 혼자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는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뭐라고. 다른 날들과 똑같이 해가 뜨고 지는 날인데, 단지 달력을 바꿔야 한다는 이유로 뭔가 '의식'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마음도 평소보다 어수선하고 무겁다. 나이가 늘어나는 게 마뜩잖아서일까. 올해는 깊게 애도해야 하는 일, 크게 분노해야 하는 일들이 마음을 짓눌러서인지도 모르겠다. 역시 기분이 3월 17일이나 7월 22일 (대충 되는대로 골라본 날이다)의 밤 같지는 않다. 집에 있는 와인에 곁들일 하몽, 치즈나 사서 소소하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들어선 편의점이었다.
딸랑딸랑.
어서 오세요. 분주하게 호빵류를 정돈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힐끗 나를 쳐다보며 인사했다. 가장 먼저 과자 코너를 괜히 둘러봤다. 와인 한 병을 비우면 땡길 것도 같은 컵라면 코너도 둘러본다. 오늘 운동도 했는데, 컵라면은 참자. 냉장 코너로 발을 돌렸다. 삼키자마자 혈당이 치솟을 것 같은 이름의 신상 디저트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결국 우유 푸딩 하나를 못 참고 손에 들었다. 세일이라고 붙여놨지만 아무리 봐도 정가인 것 같은 하몽과 큐브 치즈도 손에 든다. 계산대로 향하려다가 아무래도 컵라면이 아른거려 다시 몸을 돌리려던 찰나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가 이 코너 저 코너를 와리가리 할 때마다, 내 발길이 계산대로 향하는 줄 알고 두어 번 멈칫거렸다. 음. 그냥 계산대로 가자.
봉투도 필요 없는 작은 주전부리 몇 개를 샀을 뿐인데 만원을 훌쩍 넘는 가격이 모니터에 찍힌다. 소소하다기에는 사치스러워졌다. 봉투 필요하세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입에 붙은 인사말은 아니지만 이 시기에만 꺼낼 수 있는 인사를 약간은 어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시 호빵 코너로 가던 그가 고개를 반짝 돌렸다. 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조금 더 커진 목소리다. 출입문으로 고개를 돌리며 스치듯 본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두꺼운 유리문에 막혀 먹먹하게 들린다. 어둑하고 무겁던 마음길 속에 탁, 하고 환한 등이 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