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위로 내지는 변명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누군가에 의해 태어났다. 이게 어떤 감각을 일으킬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신은 그렇다. 정확히 날짜를 알든 모르든 생일 이라는 것을 가진 존재.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부모라는 존재가 있는 존재. 당신은 정확하게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새가 물어다 주지도, 알에서 깨어나지도, 박스 안에서 짜잔 하고 발생하지도 않았다. 불만스럽고 의아할지라도, 이 우주의 생명 탄생 공식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다. 그리하여 한번도 태어나길 바라지 않았고, 한번도 천륜이란 것 따위에 얽힐 생각이 없었을지라도 당신은 끝내 타의에 의해 태어나 이 글을 읽고 있다.
부모도 이번 생이 처음이라는 말이, 세상의 모든 자식들에게 어떤 생각을 보챘을지 궁금하다. 부모를 더 사랑하기, 부모의 행동들을 이해하기, 부모에 대한 원망을 희석하기, 부모에 대한 측은지심을 갖기, 등등. 무슨 생각이 따라오던 간에 저 문장은 비겁하다. 저 문장 앞에서 '아 처음인데 어쩌라고. 그렇다고 내가 이걸 다 이해해야 하냐?' 라는 말을 매정하게 내뱉기엔 나는 그들의 자식이다.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어른이었다는 것과 무조건적으로 따랐던 어린 기억이 있는 자식. 그런 자식인 나에게 저 문장은 비겁하다.
제법 설득이 되는 문장이라 더 비겁하다. 맞아, 처음이지. 처음이니까 실수 좀 할 수 있지, 못할 수도 있지, 처음인데도 이정도면 정말 잘한거지, 나는 이 정도도 못할거야.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결국 나는 '이번생은 처음인 부모의 시행착오' 로 인해 받은 상처와 아픔들을 혼자 끌어안는 자식의 모습을 하게 된다. 애초에 자식들은 부모를 뼛속깊이 미워만 할 수 있게끔 설계되지 않았다. 존재의 시작점이고, 혼자선 살아남을 수 없는 약하고 무방비한 형태를 어떤 방식으로든 지켜준 부모라는 존재를 어떻게 미워만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자식들은 그 이후의 생채기들에 대해서는 늘 복잡해지는 것 같다. 부모도 이번 생은 처음이라니, 안그래도 복잡한 마음에 더 박차를 가하는 문장이다. 그런 자식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 문장에 얽혀 혼자만 모든 것들을 끌어안는 일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자식들도, 이번생에 자식은 처음이니까.
며칠 전은 내 생일이었다. 남은 천조각들로 조악스럽게 만든 퀼트같은 나의 가족도, 이럴때 보는 거라며 간만에 모였다. 농담도 오가고, 더 먹으라는 훈훈한 말도 오가는 와중에 바닥에 떨어진 아버지의 마스크를 발견하고 주워들었다. 쓰면 오히려 코로나에 걸릴 것 처럼 더러운 마스크였다. 검은 때가 덕지 덕지 묻어있는 구깃한 마스크였다. 밥을 뜨던 속도를 늦추고, 아버지를 곁눈으로 관찰했다. 아버지가 환하게 웃는 순간 보인, 엉망진창인 치아들 사이 쑥 빠져있는 앞니를 마지막으로 쳐다보기를 관뒀다. 밥알은 때때로 정말 모래알같을 때가 있다. 아버지의 마스크 옆에 나란히 놓인 내 마스크는 새것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막 꺼낸 새 것. 내가 깨끗한 마스크를 쓰는 것에 이해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