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섭코 Feb 03. 2024

북향과 악몽과 발리의 기념품 Lolok

북향인 내 방



 나의 집은 북향이다. 북향인 데다 바로 앞 건물이 하나뿐인 창문의 코 앞으로 바싹 붙어 있다 보니, 해가 한낮즈음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 때만 희미한 해가 든다. 쨍한 대낮에도 불을 끄면 한밤중과 다름없는 북향. 비가 세차게 오지 않는 날이면, 날이 어두운지도 몰라 1층에 내려갔다 우산을 가지러 다시 올라오는 일이 부지기수인 북향이다.


 나는 달마다 낼 만한 월세에, 혼자 살 만한 평수인 이 집에, 북향이란 건 단점으로 치지도 않았다. 물론, 전 세입자가 짐을 빼고 난 후에 드러난 벽지 이곳저곳의 곰팡이와 베란다 바닥에 널린 바퀴벌레 시체들을 보고 잠시 절망은 했지만 말이다. 서울에서 집을 구할 수밖에 없는 직장인에게, 보증금 몇천이 어렵고도 어려운 나에게, 다달이 나가게 될 몇만원이 소중한 월급쟁이에게 고작 북향 따위는 집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아니었다. 그간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말도 안 되는 급경사에 위치한 집이나, 싱크대가 찌그러 기울어져 있던 집이나, '타인은 지옥이다'에 나올법한 음침한 입구와 복도를 가진 집들에 지친 나에게 이곳은 궁전처럼 보였으니까. 그저 해가 조금 안 들어, 전기세가 조금 더 나올 뿐인 궁전.

 나는 집주인에게 얼룩덜룩한 곰팡이 벽 사진을 열심히 찍어 보냈고, 이사갈 집에 대한 묘사를 들은 내 친구는 바퀴벌레 퇴치에 제격이라는 발을 씻자를 건네어주었다. (실제로 이 발을 씻자로 하늘로 보낸 바퀴벌레는 네 마리쯤 된다)



 내가 선택한 이 궁전에서 사는 건 대체로 나쁘진 않았지만, 북향을 탓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불길하고 나쁜 상상이나 생각들이 그랬고, 그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소재가 악몽으로 상영된 날들이 그랬다. 끈적하게 몸에 들러붙은 기분 나쁨을 털고 일어난 날에는 '북향'을 인터넷에 검색해보곤 했다.

 그 결과로 나온 '북서향 집에 대한 장점'은 아쉽게도 나를 위로해주진 못했다. 어떤 기사는 북향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로 "오후 3시부터 행복감으로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사막여우처럼, 오후에 잠깐 드는 북서향의 소중한 빛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라는 문장을 실었다. 사막 여우라니. 오전 12시 즈음 나를 슬쩍 엿보고 가는 이토록 희미하고 옅은 어린 왕자라니. 나는 그의 희망고문에 지쳐버렸다.



 여느 때처럼 안 좋은 꿈을 꾸고, 집에 대한 불평도 조금 하며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친구는 3년간의 성실한 근속의 포상으로 발리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념품 거리 가게마다 나무로 깎은 남성 성기 모형이 가득 쌓여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다양한 크기에, 형형색색의 화려한 페인팅이나 글귀(Small but spicy)가 새겨진 모형이 거리에 널려있는 사진도 함께 보내주었다. 기념품의 정식 이름은 Lolok, 무려 전통적인 발리 힌두이즘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 발리의 출생 사망률이 높았을 때, 아이가 튼튼하고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종의 부적처럼 사용된 물건이었다고 한다. 여행 중인 친구가 들은 바로는, 성인 남성의 성기 모형을 아기 옆에 두면 악령이 이미 다 자란 성인이라고 착각해 잡아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전통이 어찌어찌 내려오며 기념품으로 진화(?) 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다.



 어린 왕자식 마인드 컨트롤의 효험을 보지 못한 나는, 이번에는 발리 힌두이즘의 효험을 보고자 친구에게 '그것'을 하나 사 와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친구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 '그것'을 담아 건넸고, 어디에 담아도 수상했을 실루엣의 물건이 더더욱 수상해진 채로 내게 전달되었다. 말도 안 되는 미신이란 것도 알지만, 나는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기를 바라며 머리맡에 그것을 올려두고 잠들기 시작했다. 불길한 상상 대신 헛웃음이라도 짓고 잠에 든 탓에, 기분 좋은 꿈을 꿀 수도 있지 않겠냐는 기대도 조금은 있었다.


 발리 힌두이즘의 효험은 없었다. 아무래도 성실한 힌두교인으로 살아오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북향인 내 방에서 자면 높은 확률로 악몽을 꾸고 불면한다. 북향이 진짜 원인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북향인 내 방을 탓한다. 다음 집은 탓할 수 있는 북향이 아닌 볕이 잘 드는 곳이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