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구원 없는 만성 질환

큐어 by. 구로사와 기요시

by 소야
큐어.jpg 큐어 (1997)


지금의 현대인의 대부분은 가지고 있는 만성 질병이 있다. 위염, 편두통, 어지럼증, 당뇨, 간질환 등 말이다. 언제나 우리는 약을 한가득 집어먹는 삶을 되풀이한다. 그러면서 언제나 똑같은 고통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병원에 찾아가면 의사는 언제나 똑같이 말한다. 스트레스, 피로, 운동 부족 등이 모든 원인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피로를 풀어서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그렇게 여유 있는 시간이 존재하는가 싶다. 여유는커녕 내 몸을 침대 위에 눕히는 것도 거의 없는 세상에서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만성질환은 통증으로 다가오는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원인은 의사의 말대로 스트레스 일 수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편견에 의한 시선, 항상 마주하면서도 느끼는 관계의 불편함. 우리는 결국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는 시간이 쌓여가며 느끼는 분노의 형상이 곧 만성질환처럼 변해버린다. 정확하게는 만성질환을 가지는 나를 만든다. 그리고 가끔씩 묻는다. 나를 치료해 줄 방법이 없는가?


그래서 현대인들의 범죄는 대부분 충동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내가 항상 느낄 법한 분노를 가슴에 품는다. 평소라면 우리는 이성적인 끈을 잡고 행동을 멈춘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행동양상은 내가 느꼈던 감정에 꾹 담아 버린다. 하지만 가끔씩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무의식 속에 욕망을 끄집어내 행동을 일으킨다. 그것은 나를 구원했는가? 누구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내 안에 꿈틀거렸던 것이 뱉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큐어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질환을 초점으로 잡는다. 심리적인 최면을 통해 무의식 속에 담겨진 나를 끄집어낸다. 젊은 시인의 기침마냥 감추고 있던 울분을 토해내게 만든다. 비록 최면 속에 휘둘렸지만 기침하는 나는 비로소 해방감을 느낀다. 그렇게 해방을 주도하는 주인공 마코토와 그런 그를 쫓는 형사 타카베의 입장을 보여준다. 한 명은 인간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해방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한 명은 그런 인물의 미스터리한 여정을 쫓는다. 처음에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갈수록 사건의 본질보다는 해방 자체에 의미를 품는다.


하지만 시선이 살인 자체에서 사건의 과정으로 갈수록 이것이 해방인지 잘 느끼지를 못한다. 그들의 가슴 깊이 파고든 것을 우연한 누군가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이루어 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저 가슴 한편에 담겨진 질환들을 이용해서 나의 육체를 조종한다. 써먹은 대상은 버려두고 새로운 숙주를 찾아 떠난다.


큐어라는 사전적 의미처럼 결국 그들은 치료된 대상일까? 그리고 그런 치료를 도와준 전도사도 구원하는 치료사인가? 오히려 그들은 먹혀버린 숙주이다. 항상 현대인의 만성질환을 논하면서 우리는 그것들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항상 주도하지 못하고 주도 당한 상태로 끌려 다닌다. 질병뿐만이 아니다. 감정, 의지, 상태, 표현 등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내 뜻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을 빼앗기고 살아간다.


그것은 치료 당하는 대상만이 아닌 치료하는 본인에게도 통용된다. 본인은 치료한다고 하지만 치료라는 목적에 믿음으로 삶을 주도 당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라는 뚜렷한 존재의식도 없이 치료의 대상을 위해 살아간다. 삶이라는 정체성을 앞에 두고도 스스로 통제하지 않고 살아간다. 인간이 가진 이성을 토대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이성은 나를 이끌어 가는 형태가 아닌 내가 어느 지점까지 끌려 다닐 수 있도록 만든다.


그래서 큐어의 마지막으로 올수록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장면들이 배치된다. 마치 인간의 힘이 아닌 미지의 영역을 다룬다.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인간이 이성적인 힘이 조종당하는 것처럼 보여준다. 무력한 인간의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원망하며 끝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랬다면 앞서 말했던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초월적인 힘처럼 보이는 것도 구원도 그저 인간이 하고 있는 영역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다만 주체적인 인간이 초월적인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몇몇 알게 된 대상을 기생충 마냥 숙주로 삼아 이어져온 방식이다. 초월적인 힘처럼 보이지만 그저 줏대 없는 인간의 환상이다. 이 점에서 큐어는 인간의 형상을 직설적으로 고백한 영화로 마무리 짓게 된다. 무언가 전지전능한 존재에 의한 무력한 인간의 슬픔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 그 자체의 나약함을 담아낸다. 동시에 이로서 구원이라고 믿는 것을 선택한 인간의 오판을 담는다.


그래서 형사 타카베의 마지막 결말은 영화 큐어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가진다. 동시에 타카베라는 인물의 선택으로 감독이 담고 싶었던 인간의 형상을 적절하게 담았다고 생각한다. 결국 해방 같지도 않은 해방을 믿으면서 살아간다. 이성의 끝이 형사라는 자신에게 있었다면 해방당한 자신은 구원의 힘을 믿으며 끌려 다니다가 치료받지 못한 존재로 반복적인 구도를 봤다. 그리고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갔을 때 현대인의 찌그러진 실루엣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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