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내로 태어나 사랑을 하였을까?

패왕별희 by. 첸카이거

by 소야
패왕별희.jpg 패왕별희 (1993)

매년 4월 1일이 올 때면 나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성냥을 물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의리남. 하얀 메리야스와 사각팬티를 입고 춤을 추던 양아치 캐릭터를 연기하던 배우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캐릭터를 떠오른다.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감춘다.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채 너풀거리며 몸짓을 표현한다. 여성적인 말투와 목소리로 무대를 보는 관객은 눈을 떼지 못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자지만 본래 사내로 태어난 가련한 존재를 말이다. 바로 영화 ‘패왕별희’에서 주연이었던 데이역할을 떠올린다.


그런데 왜 영화 패왕별희냐고 물을 수 있다. 장국영이 출현한 영화는 너무 많은데 말이다. 그러면 나는 항상 대답한다. 영화 패왕별희는 장국영을 완성시킨 영화이다. 어떤 영화는 장국영을 카리스마 있고, 의리 있는 배역이었다. 또 다른 이는 왕가위 영화에서 사용된 장국영의 이미지에 감동받는다. 하지만 사내로서 본래 태어난 운명을 타고난 두지가 계집으로서 삶의 종지부를 찍은 데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장국영은 섞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영상 속에 이끌어낸다. 그것이 장국영만이 할 수 있던 연기방식이었다.


특히 패왕별희에서 순수하게 사랑을 원했던 데이의 입장을 대변한 점은 배우로서 가진 이미지를 생각하면 불편할 수 있다. 특히나 데이라는 사내가 사내로서 사랑을 할 수 없었던 복잡한 사정을 안다면 더욱 말이다. 무대 위에서나 치마를 두르고 사랑을 노래하면 얻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진심을 담은 사랑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그저 나를 무대 위에 보는 시선 속에 갇힌 사랑이다. 그러나 장국영은 그런 데이를 사내로서 받아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얻을 수 없었던 데이의 운명을 끊어질 정도의 고통으로 승화시켰다. 여자라는 갇힌 삶 속에 살면서 본래의 존재마저 잃어도 데이를 연기했다. 그 시대가 바뀌어도, 삶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나를 연민하거나 욕망하는 상대만이 바뀌는 과정에서도 데이는 데이였다.


결국 나를 본래 사내로서 사랑해 줄 상대는 아무도 없다. 내가 연민하고, 타락해도 운명이 곧 나를 사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내가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났으면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구식의 것을 짊어지고 고집 피우는 데이라는 인물을 어찌할 수 있을까. 살아가는 와중에도 바뀌지 않는 것을 그는 너무 많이 겪었다. 비참해도 달라지지 않는 데이의 사랑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논할 수 있을까 싶다. 바라만 보는 짝사랑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내는 넘쳐난다. 하지만 사내가 되어 내가 사랑할 수는 없는 인물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할까.


장국영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데이처럼 사랑과 비극을 알고 있다. 항상 성공할 수 없는 사랑을 알고 있기에 가슴이 미어진다. 육체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도 포함된다. 성별의 다름과 같음도 물론 존재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된다. 저질러버린 사랑을 탓하거나 깨져버린 사랑에 울분을 토해도 지속한다. 사랑의 끝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비참한 내 인생의 종지부가 오기 전에 바뀔지도 모를 나를 바라보며 사랑을 저지른다.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나를 위해 헌신하며 미친 짓을 감행한다. 그런 감정을 품은 인간이기에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던 것을 영화는 기막히게 풀어낸다.


바보 같은 사랑을 결정지으며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영화 패왕별희는 지금까지도 기억될 수 있다. 배우 장국영은 그런 데이라는 바보 같은 사내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리고 감정을 이끌어냈다. 화려한 연출과 방대한 서사도 물론 패왕별희를 이끄는 중요한 포지션이다. 하지만 영원히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반복적인 서사는 영화를 관통시켰다. 그래서일까 나는 장국영의 영화를 떠올린다면 늘 처음으로 ‘패왕별희’를 떠올린다. 단지 배우로서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을 필름 위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내로서 태어나 사랑을 했던 캐릭터 그리고 배우를 보면서 깨닫는 것이 많다.


그래서 나는 올해 4월 1일이 되었던 날 패왕별희를 다시 마주했다. 시대를 넘나들면서도 사랑을 위해 몸부림치던 본래 사내로 태어나 계집으로 살았던 비극적 운명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처음 본 것처럼 다시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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