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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Apr 20. 2023

평범한 당신을 용서합니다

연극 아마데우스 by. 피터 셰퍼

아마데우스 (2023)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르 증후군이라는 표현을 만들 만큼 강렬했다. 동시에 실제 역사와 다른 이야기 진실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대체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 희곡 아마데우스가 우리들의 주변에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살리에르라는 캐릭터의 불멸성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희곡을 오리지널 스토리로 선택하여 만든 영화도 물론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였다. 모두가 아마데우스를 연극으로 기억하지 않으니까. 그러면 살리에르는 무슨 이유로 연극 아마데우스에 남아 그 시대를 넘어 현대를 사로잡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살리에르와 모차르트를 살펴봐야 한다. 살리에르는 욕망을 가지고, 재능 있는 모차르트를 추종했다. 동시에 질투에 눈이 멀어 비겁한 수로 자신의 적(敵) 모차르트를 죽였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죽인 적이 없다. 하지만 무대 위에 살리에르는 그렇게 실현시켰다. 단지 질투로 그가 타락하고, 끝내 사람을 궁지로 몰아붙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살리에르가 품었던 감정은 질투만은 아니었다. 모차르트라는 존재에 대한 추종과 가질 수 없는 재능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자학도 가득했다. 끝내 스스로를 죽여가면서 모차르트를 파멸로 몰아붙인다. 

  

살리에르의 행동이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비도덕적인 행태를 감당하고, 신에게마저 도전까지 한다. 그것이 모차르트를 죽이는 행위라고 믿었다. 모차르트의 재능이 불꽃처럼 싸늘하게 꺼지기를 바랐다. 동시에 모차르트라는 존재에게 욕망을 품고 흐느낀다. 모차르트의 순수한 음악에 무너져간다. 살리에르의 독백은 무대를 보는 관객마저 처절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순수한 광기의 모차르트를 죽이고 싶다. 재능밖에 없는 신의 음악가 모차르트를 파멸로 인도하고자 한다. 그리고 살리에르가 다시 신의 재능으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도 그저 평범한 한 명의 대상이기에 살리에르와 동일시하게 변해간다. 


하지만 살리에르의 모습을 이렇게 끝냈다면, 누구도 희곡을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에게 버려진 재능 없는 살리에르, 질투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살리에르라고 고정되어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끝내지 않았기에 피터 셰퍼는 무대 위에 영원히 기억될 연극 아마데우스를 남겨둘 수 있었다. 바로 살리에르가 평범한 자신을 그리고 평범한 타인에게 용기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 연극의 진정한 의미가 피워 올랐다. 평범하기에 재능 있는 이를 무시할 수 없다. 나도 재능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언제나 실패하는 역설적인 순간만이 다가온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재능 없는 평범한 나를 용서하고 끝내 살아간다. 

  

특히 연극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모차르트의 슬픈 최후를 앞둔 레퀴엠의 창작과정에서 살리에르는 선택한다. 살리에르는 재능만을 가진 모차르트를 파멸로 인도했던 것에 용서를 구한다. 동시에 재능을 향한 구원을 통해 스스로의 평범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동시에 왜 나에게는 이런 것을 주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언제나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걸쳐왔지만 성공한 인생을 향해 박수를 보낸다. 살리에르처럼 재능에 기쁨을 그리고 추악한 질투를 중의적인 감정을 박수에 숨긴다. 그는 끝내 용기를 내고 자신이 원망하던 모든 것에 용서를 구한다.  


그러한 점은 모차르트가 남긴 음악은 평생의 예술과는 달랐다. 피터 셰퍼가 창작한 살리에르는 질투, 욕망, 재능 그리고 용서라는 끝없는 굴레를 보여주었다. 마치 평생을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이다. 우리가 느낄법한 모든 것이다. 우리는 쉽게 살리에르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저 느끼는 모든 것이 그에게 있었으니까!  그것이 연극을 완성시켰고, 우리가 살리에르를 기억하게 만들었으며 무대 위에 영원히 남을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 운명도 짊어지다 보면 언젠가 새로운 방면으로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재능 있는 이처럼 세상을 깨고 나올 수는 없다고 말은 한다. 평범한 나를 용서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갈망한다. 그리고 살아가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쏟을 수 있는 용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살리에르만이 남긴 것이었다. 그렇기에 연극 아마데우스의 이름 위에 남아 있는 인물 살리에르로서 영원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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