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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Apr 14. 2023

텍스트에 가려진 '만선'

만선 by. 천승세

만선 (2023)

한국 희곡 '만선'은 2008년 수능에도 출제되었다. 수능 출제 이후로도 이미 많은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위해 자료가 있었다. 나도 그 자료를 확인하고, 희곡의 일부 지문을 읽으며 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희곡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곰치의 심정과 이유 그와 관련된 여러 의미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지문에 나오는 진짜 감정은 몰랐다. 지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곰치의 심정을 제한된 시간에 따라 찾아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객관식에서의 5개의 답은 진짜가 아니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그의 비통한 심정은 5개의 표현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항상 수능 언어영역에서 문제당 사용해야 하는 시간에 따라 지문을 분석한다. 그리고 이해한 지문으로 답을 찾으라고 가르쳐 주신 선생님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어는 텍스트로서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러나 목적이 단지 지문을 읽고 해석된 형태를 찾아내는 기술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수능을 위해 배우는 언어는 수만 단어 중에 일부의 문장의 찾아낸다. 해석된 답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강요받는다. 내가 읽는 지문은 일부에서 느낄 감정은 전혀 없다. 그저 읽은 다음 필요한 대상을 찾아야만 끝이난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명작이라고 평가받는 만선이라는 연극을 봤다. 60년대 해방된 직후에도 가난하게 고기잡이로 생업을 잇는 어민들의 슬픔을 담은 연극은 짠하다 못해 고통마저 느껴진다. 무엇하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그들의 앞에 희망이라는 것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참한 현실을 겪는다.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감정의 출렁거림을 느끼는 것은 연극을 보는 동안에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느껴졌다.    

  

바로 지문에서 알게 된 곰치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마주해서 생긴 감정의 울분이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동요하는 감정은 어떻게 조절할 수 없었다. 곰치의 상황을 텍스트로만 깨닫지 않고 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느껴갔다. 오로지 문장 내에서 이해되는 부분만을 찾아내는 훈련만 반복하던 나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텍스트 너머에서 느껴졌던 순간의 모든 것은 전율처럼 타고 흘렀다. 그리고 직접 겪은 것 마냥 묘한 기분을 품은채 극장을 떠났을 때 한껏 영혼이 힘껏 빨려나갔다. 

  

그리고 다시 수능 때의 지문이 떠올려 봤다. 너무 오래되어서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절정에 다가서려는 지문이었기에 그 순간을 대치하면서 기억하던 연극은 얼마나 무심하게 그 지문을 지나쳤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이해되는 것은 연극만이 아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모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언어영역에서 항상 화자의 심정과 심리 등의 해석된 자료로 강조하여 익혀나가면 그만이었다. 본질적인 형태의 의미는 인식하지 못한 채 넘긴 작품을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민들레는 희망이고, 보라색은 절망이라는 상징과 해석으로 점철된 국어시간에서 읽기와 문제풀이는 알기만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이렇게 끝내버리는 언어의 가르침에 학생들은 과연 무엇을 찾을지 하는 복합적인 심정을 느낀다. 비록 30살이 조금 넘어버린 내가 이제 깨달은 것이었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텍스트로서만 인식하지 말고 문장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표현된 작가의 의미를 스스로 찾는 것까지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연극 만선이 나에게 보여준 것처럼 내가 배운 것을 다시 돌아가 보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물론 교육과정이 모두 틀린 것인 아니다. 하지만 다른 것일 수 있기에 한 번 시도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지금에 와서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수 있다. 그래도 연극 만선의 비극처럼 나를 다시 깨우쳐줄 무언가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싶다. 비극에서 찾는 희망만큼 이상한 말도 없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비록 연극 만선이 오래된 작품인지라 더 이상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을지라도 나에게는 오래도록 남을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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