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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Apr 12. 2023

스트린드베리에게
노벨상을 허락하지 말라!

미스 줄리 by.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미스 줄리 (2016)


세계에서 가장 권위적인 상을 이야기한다면 대부분 노벨상을 이야기할 것이다. 많은 과학자와 작가 그리고 세계의 여러 활동을 하는 이들의 위대함을 위해 수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벨상의 위엄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하지만 한 인물한테 만큼은 노벨상을 절대로 허락하지 말라고 노벨상의 아버지 노벨은 유언으로 남긴다. 바로 북유럽의 셰익스피어 스트린베리 아우구스트였다. 

  

지금 시대에 스트린드베리의 작품은 고전의 일종이라서 지루하다. 자극적인 서사라고 해도 대부분은 현대시대에서 자주 보이는 막장 드라마 같은 작품과 실험극으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는 달랐다. 광기를 뒤엎은 듯한 그의 작품으로 많은 기득권 세력과 보수적인 입장을 지닌 사람들은 경악했다. 마치 체제를 뒤엎으려는 선동가 같은 불경스러운 소재와 이야기로 당시 사회는 그를 달리 봤다. 끌어 오르는 불꽃같던 인간에게 보인 공포스러움에 그들은 혀를 둘렀다. 

  

특히 희곡 ‘미스 줄리’는 그런 시대를 적나라하게 담아낸 그의 걸작 중 하나다. 미스 줄리를 읽어보면 스트린드베리가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름만 듣는다면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희곡의 속사정은 다르다. 욕망과 파멸이 담긴 작품으로 이야기가 독하게 느껴진다. 물론 현대인에게 막장 드라마로 엮어진 서사는 익숙하다.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여주는 신분상승과 욕망 탄생의 비밀 등과 같은 욕망을 품은 인간의 생과 사를 논하는 드라마들이 한도 끝도 없이 나오니까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스트린드벨의 막장극은 더욱 자극적이고, 욕망이 점철되어 귀족사회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한없는 부끄러움과 고귀하게 포장한 성적 욕망과 종교적인 위선 따위를 들먹이면서 말이다. 


그래서 당시의 쓰인 희곡서사는 흥미보다 어쩌면 끔찍한 공포라고 할 수 있다. 백작의 딸이자 귀족의 아가씨인 줄리는 사랑을 원한다. 귀족들의 가식적인 표현보다 진정한 사랑을 추구했다. 그래서 자신이 순수하게 꿈꾸는 세계를 새로운 이상향을 쫓아다닌다. 하지만 신분을 노리고 노래하는 하인 장은 백작의 딸 줄리의 순진함을 등쳐먹고자 하는 악랄한 사회상을 보여준다. 그것만일까 종교라는 방패를 뒤집어쓰고 위선적인 행동을 선보이는 장의 약혼녀 크리스틴이 펼치는 위선적인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의 종교는 순수한 이성과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믿는 자의 구원이라는 희망을 심게 만든 거짓된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진정한 순수함일까? 무엇 하나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한 채 거짓된 것에 심취하여 살아간다. 그런 막장극을 통해 스트린드베리가 품어온 인간의 진실된 감정을 끄집어냈다. 스트린드베리의 희곡은 나타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 기득권 사회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누리고 있는 고귀함 따위는 사라졌다. 가식적인 가면 뒤에 숨었던 그들의 형태는 드러난다. 그것이 불편한 귀족들의 사회에서 스트린드베리는 골치 덩어리다. 위대한 신화와 예술의 창조를 뒤로하고, 점차 선동적이고, 실험적이며 악랄하게 변해갔기에 노벨상의 수여를 꺼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벨은 왜 그에게 노벨상을 허락하지 말라고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작품을 직접 보면서 노벨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잊힌 것은 아니었다. 스트린드베리는 훗날 현대의 희곡과 연극의 아버지 중 하나로 손꼽혔다. 그에게 있어 희곡은 당시에는 영원한 적들에게 둘러싸여 빛을 바라지 못한 결과의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시대가 뒤바뀌며 실험적인 희곡과 실내에서의 연극, 새로운 배경과 그의 예술론은 북유럽의 거장으로서 걸맞게 존중되었다. 그의 작품은 시대가 변해갈수록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다. 설령 노벨이 그에게 노벨상을 허락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처럼 박혀서 새로운 예술의 혁명가로 발돋움했다. 

  

물론 노벨상의 권위를 본다면 현시대에 상을 수여받는다면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낸 결과이기에 누구나 원한다. 그러나 상의 권위로 자신을 상징하는 것은 때론 좋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스트린드베리처럼 수여 자체를 거부당했다 해도 말이다. 시대에 따른 결과를 만들어낸 작가 혹은 어떠한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시대를 만나 가혹했지만, 시대를 만나 완벽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희곡 미스 줄리는 더 이상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작품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공포를, 지금의 시대에는 예술과 의미를 남겼기에 더 필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시대의 거장으로서 기억되고 있는 그에게 노벨상이 주는 권위는 너무 작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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