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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Mar 08. 2023

욕망을 거세당한 인간

에쿠우스 by. 피터 셰퍼

연극 에쿠우스 (2022년)


나를 부르는 한 마리의 말이 있다. 그 말은 나에게는 신과 비슷하다. 마치 성경 속에 나오는 성스러운 근원 같다. 그것이 내 곁에 머무는 동안 나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 솟아오르는 전능한 힘을 꿈꿀 수 있다. 그의 발굽이 하늘 치솟듯이 높게 들어 올려진다. 히이잉 거리며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의 끊임없는 적들 앞에서 그는 용기를 북돋으며 달려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속으로 외친다. 그래 모든 것은 준비되었다. 타오르는 욕망을 품은 나는 나의 신 에쿠우스를 타고 함께 달려간다.  

  

피터 셰퍼의 희곡 에쿠우스는 소년이 말의 눈을 찔렀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범죄를 저지른 소년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피터셰퍼는 연극에서 일으킨 소년의 잔혹한 폭력을 잔인한 사건으로 매듭짓지 않는다. 오히려 소년이 벌인 잔인한 범죄를 기반으로 소년에게 남겨진 다양한 메시지를 새겨 넣었다. 소년이 에쿠우스를 향해 느끼는 동경, 끓어오르는 욕망, 갈망할 수밖에 없는 자유 등을 말이다. 


여러 번 반복해서 봤던 나도 소년의 모습에 따라 투영되는 의미를 다르게 생각하게 만든다.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기에 지금까지도 무대 위에 추앙받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 연극 에쿠우스의 주인공 알런에게 보인 것은 욕망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보통 욕망은 타락한 무언가라고 정의 내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성적인 것, 탐욕스러운 것, 권력 지향적인 것, 살인욕구까지. 이성적이지 못한 무질서한 것으로 인간이 지니면 안 되는 것으로 거부한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을 자주 부정하거나, 종교적인 잣대 혹은 사회적인 법과 윤리적 사상으로 욕망을 제어시킨다. 


물론 욕망을 자신을 채우기 위해 남을 헤치거나, 문제를 일으켜서 채운다는 것은 결코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욕망은 항상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느끼는 자연스러운 특색과도 같다. 그래서 감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품은 것을 해소시켜야만 삶의 새로운 진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욕망을 제어할 때 인간답다고 판단하며 그것을 최상위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에 현대의 인간은 항상 불만과 억압에 힘들어한다. 


그런 점은 연극 에쿠우스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의 흔들리는 독백을 통해서 잘 느껴진다. 인간이 가진 불행은 자신만의 것을 찾지 못한 채 사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의사인 주인공은 열악한 사내로서 욕망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급급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알런에게도 넘어가면서 욕망은 단순히 옳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만든다. 태어난 순간부터 인간은 욕망을 느끼며 살아간다. 다만 교육과 시스템으로 욕망을 해소하지 못하도록 차단되었던 것뿐이다. 


사회 시스템은 알런을 억압시켰다. 자신이 하고 싶은 욕망을 이루지 못하고 과잉보호당하는 가정에서 자라난 알런에게 욕망은 자신이라는 의미를 구체화시킬 유일무구한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 욕망은 이상한 형태로 발현되는 것 같아서 그를 광인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알런은 자신이 채워가는 욕망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거듭해 나간다. 자신이 이상적인 의미를 향해 울부짖는다. 그리고 기도한다. 에쿠우스라는 성경 속에 상상된 말에게 투영된 것으로 모든 열의를 쏟아내어 자신을 이끌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알런이라는 인격을 배척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를 우리와 같은 존재로 만든다. 공동체 사회에서 개성을 추구하는 욕망은 순수성이 아닌 죄악이다. 그렇게 만들어버린 의사 다이사트의 끔찍한 거세현장을 보게 된다. 그렇게 에쿠우스와 함께 욕망을 쫓던 알런의 끝은 거기까지였다. 자신을 몸 받쳐 한껏 피워 오르는 욕망을 추구했던 알런은 죽었다. 


왜냐하면 이미 알런이 추구하던 욕망은 꺼져버렸다. 알런이라는 존재가 보편적으로 살아가는 남들과 똑같은 삶만이 남겨졌으니까. 보통의 사람들처럼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다. 보통의 경제활동으로 스쿠터 혹은 자동차 가끔의 경마를 즐길 것이다. 혹은 조그마한 일탈로서 포르노 상영관에 갈 것이다. 그렇게 보통의 인생을 살아갈 알런만이 남겨졌다. 더 이상의 에쿠우스는 없다. 재갈을 물고 기도하는 미친 자의 욕망은 씁쓸하게도 귓가 너머에만 남겨졌다. 우리는 결국 무대 위에 에쿠우스를 보며 묻는다. 우리는 보통의 거세당한 인류로서 행복한지 말이다. 


물론 정상적인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욕망을 순수하게 보지 않으니까. 끊임없이 계산적인 이성적인 구조만을 중시한다. 그리고 욕망하는 것을 구분 지으며 스스로 거세를 시전 한다. 어쩌면 알런의 입장에서 우리는 미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욕망을 거세한 정상인의 자부심을 느끼기에 상관하지 않는다. 순수한 욕망의 근원은 잊는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모두 잘못된 어떤 것이니까. 그렇게 알런이라는 존재가 품어온 의미를 거세한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의 고독한 독백으로 에쿠우스를 막을 닫는다. 


하지만 무대의 독백에서 그는 다시 고백한다. 에쿠우스는 아직 끝나지 사라지지 않았다. 길게 울려 퍼지는 말 울음소리, 발굽으로 내리찍는 땅의 울림과 바람에 휘날리는 갈퀴가 보이고 또 들린다. 이제 와서 늙어버린 자신에게 찾아온 것은 알런이라는 욕망을 거세한 자에 대한 복수일까? 혹은 전염된 것인가? 무엇이 어떻게 되었던 에쿠우스가 멈추는 일은 없다. 감춰진 것일 뿐 인간은 누구나 품고 살아가는 존재가 있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만 그것은 다이사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연극이 끝나 암전이 된 무대를 바라보거나, 페이지가 끝나 덮은 책에서도 나는 에쿠우스의 소리가 들린다. 멈추지 않는 말발굽와 함께 들리는 울음소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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