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빙 빈센트 by. 도로타 코비엘라, 휴 웰치맨
과거에 나는 런던의 중심에 위치한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서 영국이 자랑하는 대형 미술관인 내셔널 그래픽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처음 봤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빛의 마법사, 정신병자, 귀를 스스로 자른 사나이 등. 수많은 별명이 붙은 사내의 그림은 미술서적 혹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실생활 용품에 박혀서 너무 친숙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걸려있는 미술관에 직접 봤을 때 느낌이 달랐다. 화려한 색채, 강렬한 붓터치로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은 그림이 나를 유혹했다. 그때 본 해바라기는 마치 해를 듬뿍 머금은 강렬한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과연 미술을 모르는 대중조차도 사로잡을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미술과 다르게 그의 삶은 불행한 삶으로 끝났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불우한 인생을 그려낸 고흐의 그림을 보면 아련함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그의 그림은 알수록 더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의 그림을 이용해 이야기를 그려나간 애니메이션이 있다. 바로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였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실제 고흐를 마주했던 인물들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직접 마주했거나 가족이었거나 하다못해 고흐에게 상처를 주었던 이들까지 말이다. 하지만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는 점차 고흐라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도록 짜인다. 그는 그냥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인 룰랭은 고흐에게 온 편지를 전달하는 일이 처음의 목적에서 완전히 멀어진다. 편지를 전달하려는 그의 목표에서 고흐라는 인간을 고민하게 된다. 그가 가진 슬픔과 불행에 대해 파헤친다. 동시에 그가 품고 있던 열정에 대한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무엇이 고흐를 달구게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면 고흐라는 불안정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열정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거나 거부한다. 그의 열정에 비웃음과 조롱으로 무시한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끌어내서 만들고자 했던 고흐의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불행한 인생 너머에도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을 찾아간다.
물론 고흐가 살았던 인생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은 아니다. 다만, 그가 믿었던 삶은 우리가 그를 동정하는 삶보다는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비록 그의 수많은 실패와 장애물이 문제가 되었더라도 그는 포기하지는 않았다. 자신만의 삶과 죽음을 선택했다. 인간은 누구나 삶의 순간을 운명이라고 믿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운명을 개척했다는 것만으로도 고흐는 자신의 인생의 주관적인 존재로 남았다. 그러한 운명은 죽음 이후에서도 그를 불멸로 만들었고 누구나 기억하는 화가가 되었다. 살아있는 동안에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없는 안타까움은 있다. 그래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걸 생각하면 나름의 위로는 아닐까도 생각한다.
아무튼 다시 내셔널 그래픽에서 봤던 반 고흐의 그림을 잠시 생각한다. 강렬한 노랑, 짙은 파랑 등의 색채로 무장한 그의 그림에 대해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동시에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장면을 겹친다. 마치 반 고흐의 그림이 실제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실제 세상과는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물감으로 그려낸 마술 같은 세계가 곧 실제인 것 같은 환상성에 심취한다. 마치 고흐의 그림처럼 빛으로 변해가는 아름다움을 품었고, 누구도 불행하지 않고 순수성을 가득 품은 빛의 이미지 같다.
그가 꿈꾸던 세계는 아마도 이런 곳일 것이다. 가끔은 아이 같은 고흐의 집착이 안타깝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칙칙한 사회에서 반 고흐 같은 색채를 품는다면 세상은 좀 더 나아질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여전히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사랑하고, 동경하며 그의 불행한 인생마저 포옹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