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주근깨 공주 by. 호소다 마모루
우리는 ‘나’라는 본연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 다수의 타인도 똑같이 자아를 가진 '나'를 품는다. 철학자 데카르트처럼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내린 결론에는 ‘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이자, 동시에 모든 것이다. 그만큼 '나'라는 존재는 주관적인 형질의 무한적인 존재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나라는 존재를 거부하거나, 숨겨도 변하지 않는다. 가끔 TV 예능에서 부캐라는 말을 사용한다. 내가 아닌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며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런 연기도 결국 나라는 존재의 대체하는 캐릭터일 뿐이다.
애니메이션 ‘용과 주근깨 공주’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나’라는 존재를 아무도 모르는 가상 속의 세계에서 익명성으로 가진채 살 수 있다. 그러나 가상의 세계에서 움직이고, 말하는 것조차 모두 내가 하는 행동이다. 익명 속에 숨어서 가상의 세계인 'U'에서 적용된 형체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아닌 타자처럼 나를 꾸민다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노력으로 가장 무대회에서 춤추는 인형 같다. 하지만 타인은 나를 모르기에 그렇게 믿는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나’이면서, 가상세계에서 보이는 익명의 ‘나’이다.
현대사회의 소셜 네트워크와 메타버스라는 용어가 사용되면서 이런 서사는 더욱 익숙해진다. 사람들은 가상의 익명으로 흘려보낸 행동범주에 속해있다. 그러나 가상의 세계에서의 나는 조금씩 꾸며지거나 다르게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나를 환호하거나 비하한다. 나는 타자의 세계에 속해진 나인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현실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존재처럼 살아간다. 가상의 세계는 나를 모르기에 활동할 수 있다. 분명히 가상현실에서 활동하는 것도 내가 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마치 타자에 몸을 빌려 대신 활동하는 모습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세상에 도달했다. 분명히 내가 키보드와 스마트폰을 활용해서 글을 올린다. 혹은 유튜브에서 버츄얼 시스템을 이용해 사람들과 소통한다. 아니면 익명의 아이디로 누군가처럼 흉내를 낸다. 내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연의 나는 존재하고 있기에 감춘다고 해도 바뀌지 않는다. 매 순간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고 부정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이렇게 내가 아닌 것을 집착하는지 궁금해진다.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자존감이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대신해서 감추기 위한 선택을 결정했다. 혹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상처를 이겨내고자 하는 결단도 있다. 가식적인 태도도 한몫을 할 것이다. 이렇게 집착해서 달라질 것이 있는가도 생각한다. 가상이라는 세계에서 얻게 된 자신감은 물론 나를 성장시킬 때도 있다. 하지만 본질적인 ‘나’가 아닌 만들어진 자아는 다시 가상의 세계로 유혹시킨다. 얻을 수 있는 성장은 드물게 느껴지면서 포기해 버린다.
그래서 현실로부터의 나를 찾지 못하면 영원히 반복적인 굴레에 놓인다. 물론 그걸 포기하고 살아도 상관은 없다. ‘나’라는 개인은 어디에 있던 살아만 있으면 충분하다. 인간으로서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가상의 세계에 속해있던 내가 실제 현실을 만나는 것에 괴리감이 느껴져 포기를 선언할 수 있다. 하지만 마주하는 것은 중요하다. 본연의 ‘나’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말이다. 잠시 소설 데미안의 문장을 인용하고 싶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결국 우리가 가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은 나를 완성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애니메이션 용과 주근깨공주에서도 비슷한 의미를 이끌어낸다. 바로 가상의 주근깨공주가 아닌 스즈라는 존재로서 다시 태어난다. 가상의 세계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알에서 탈피한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누군가를 마주하며 구원을 추구한다. 자신의 이러한 선택이 올바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끄러운 삶을 항상 마주해야 하는 자신을 원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끝내 스즈는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 가상의 세계를 깨뜨린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보는 사람들은 창작 서사니까 가능하다고 부정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느 한 두 명은 알을 깨고 세계의 밖에서 나올 거라 믿는다. 스즈처럼 용기 있는 결단으로 ‘나’를 마주한 몇몇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어디에 있던 ‘나’는 존재하지만 진정으로 ‘나’를 마주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도 나의 세계를 위해 결정하는 것은 굉장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