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뱅크시 전시회 (2024)
2018년, 영국 런던의 소더비 경매에서 가장 화제의 작품이 등장한다. 우리에게는 그래피티 화가, 반달리즘의 대가, 혁명적인 예술가로 알려진 익명의 예술가 뱅크시의 그림 ‘풍선과 소녀’가 등장한 것이다. 소더비 경매장 내에서 굉장히 열기가 뜨거웠다. 그리고 경매는 끝으로 다가오면서 최종적인 낙찰가 86만 파운드로 끝을 맺는다. 경매사가 낙찰이라는 말과 함께 미리 설치해 둔 그림액자의 파쇄기가 작동한다. 그림은 점차 밑으로 내려가더니 절반쯤 지나 겨우 파쇄기가 작동을 멈춘다. 파괴된 그림의 원본에 사람들은 경악을 표한다.
이렇게 뱅크시의 원본그림은 절반이 사라진 채 많은 뉴스에 화젯거리로 올랐다. 특히나 중요한 것은 테러의 주동자가 그림을 그린 뱅크시였다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 대한 모독과 반란이라는 표현도 쓴다. 한편으로는 예술의 세계의 끝없는 비판의식도 나타난다. 뱅크시의 이러한 충격적인 태도와 행동에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서울에서 진행한 뱅크시 전시회를 통해 뱅크시라는 예술의 종지부를 알 수 있던 것 같아 만족스러운 것 같다.
익명의 예술가 뱅크시가 한국에 온 것은 한두 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뱅크시를 처음 마주한 것은 나름 괜찮은 순간이었다. 특히나 뱅크시라는 세계의 총집합체를 일부라도 마주한 느낌이었으니까. 뱅크시는 그래피티로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풍자를 하던 예술에서 시작한다. 후에는 회화 조각, 생활용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품까지 판매하여 예술이라는 분야의 계층적인 허물을 부시려는 노력을 많이 시도했다. 그건 말로만 한 것은 아니다. 본인이 직접 예술이라는 세계의 영역을 대중에게서 느낄 수 있도록 창조하였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물론 어떤 평론가들은 뱅크시의 예술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뱅크시가 예술이라는 세계의 허상을 찢어냈다고 본다, 동시에 진짜 예술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이러한 점을 볼 수 있는 예시가 있다. 뱅크시는 과거 2013년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한 노인을 고용하여 매대에서 그림을 팔게 한다. 그림은 전부 8점이 팔렸고, 한 점당 60달러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노인의 허름한 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것이 뱅크시의 그림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 후에 그는 소셜 미디어에서 직접 글을 쓴다.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노인이 팔고 있는 그림은 본인의 그림이다. 많은 미술 컬렉터들을 그곳으로 달려갔지만 매대는 이미 끝나 버린 지 오래였다. 과연 예술의 본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림을 소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욕망을 담은 현실일 수 있다. 혹은 예술이라는 가치성에 대한 본질을 회복하고자 하는 뱅크시의 의지를 담은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예술은 그렇게 세상에 나와서 팔리거나 팔리는 것에 주목받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가진 예술의 태도를 대중과 함께 받아들였으면 하는 목표의식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그의 노력과도 다르게 예술은 여전히 자본의 시장에 목줄에 매여 있을 것이다. 돈이 돈을 부르는 사회인만큼 돈으로 부르는 가치 있는 그림을 사들이고, 모아서 자신들의 왕국을 세울 것이다. 예술에 대한 가치성과 대중과의 공유는 전혀 없는 세계로 자리매김할 테니까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뱅크시의 작은 노력조차 없었다면 예술의 진보는 없었을 것이다.
이번 서울에서 열린 ‘리얼 뱅크시’ 전시회도 미래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뱅크시가 완벽하다는 건 아니다. 그도 보이는 퍼포먼스와 예술의 표현으로 비판받는 자신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현대 예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기에 그는 노력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도 그의 예술에 반해 지금껏 그를 쫓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만큼 뱅크시는 모호하고, 어렵지만 동시에 매력적인 예술가임이 틀림없다.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