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by. 조나단 글레이저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했던 유럽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던 그때의 시간을 떠올려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서 죽었던 유대인들의 불행한 역사는 참혹했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 이들은 특별한 존재이거나 사이코 패스는 아니었다. 물론 나치에 사상에 감염되어 혹은 인종차별적인 미치광이는 존재했을 수 있다. 과거 아이히만의 재판정에서 그가 보여준 악은 평범한 공무원이 아니었다는 진술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나 알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저서를 잠시 꺼내보려고 한다. 너무나도 식상한 제목 ‘악의 평범성’ 말이다. 한나 아렌트의 책에서 악은 무언가 특별하거나 의미 있는 존재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이들을 주목한다. 그들이 어떻게 악에 대항하지 않고 동조하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우리가 악이라는 존재로부터 물드는 과정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과연 우리의 내면에 악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악이 우리를 침묵하게 만든 것인가? 혹은 악이라는 것에 대한 의미는 없는 것인가?
여러 고민을 하게 만드는 이번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며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는 앞서 말한 유대인 학살을 실행했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관리자와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평범한 일상, 평범한 군인 가족, 평범한 가정생활을 꾸리는 이들의 옆에는 바로 수용소가 있다. 평범한 대화를 하는 이들은 유대인을 죽일 설치기구를 설계하고, 방식을 설명 듣는다. 유대인을 부려먹고, 협박한다. 아이들은 나치의 사상에 따라 동조되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
하지만 영화는 평범한 일상 옆에 수용소를 배치하였다. 그 점에만 주목했다면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수용소를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수용소에서 들려오는 소리, 정치적인 상황에 따른 유대인들의 학살 상황 등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유대인의 죽음을 직접 보여주며 죽음에 대한 분노 혹은 슬픔을 인식시키지 않는다. 마치 독일의 공무원처럼 일을 하는 정부 인사들의 평범한 태도를 가진 이들의 말과 소음으로 악의 행위를 입증시킨다. 그러나 악이라는 것이 과연 무언인가라는 정확한 태도는 없다. 그들은 자신의 직장에서 하는 평범한 업무 처리를 진행하며 그 일의 완벽성을 추구할 뿐이다.
물론 영화 중간마다 자신들이 해온 행위에 대한 죄책감, 혹은 잘못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오히려 익숙해져 버린 업무는 죽음을 이루게 만든 숫자와 해결되는 수용소의 문제를 파악해 나갈 뿐이다. 그렇게 악이 평범해지고 있다. 아니 악은 그들에게 익숙해지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평범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항상 악은 그들에게 익숙하도록 친절하게 물들일 뿐이다. 그러한 점을 보여주는 장면은 결말로 갈수록 더 진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부터는 당신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읽지 않는 것을 추천드린다.
영화의 결말에서 현대의 아우슈비츠를 박물관으로 만들고 관리하는 두 청소부의 모습을 비춘다. 주인공인 회스는 계단을 내려가며 현대의 장면과 대비되는 구토하는 행위를 보여준다. 반복된 역사의 장면과 현대의 교차는 그의 반성을 나타내는 것인가? 나는 그가 만들어낸 현대의 박물관의 모습이 익숙해진 악의 결말을 보여주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과거를 잊지 말자며 보여주는 유대인 학살의 흔적과 유골을 보면서도, 그들은 평범하게 박물관을 청소한다. 누군가가 죽었을 공간을 치우고 닦는다.
주인공 회스는 평범하게 나치의 건물 지하로 내려간다. 두 장면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자는 메시지보다는 악의 지점에 도달한 인간의 죄악을 고발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악이라는 존재의 평범성을 위장한 이들의 결과는 이러했다. 그만큼 보여준 끔찍한 경과를 보며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어쩌면 감독은 악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 이끌어 내는데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악은 없다. 단지 악이 익숙해질 뿐이라는 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