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이코 by. 알프레드 히치콕
현재 많은 영화의 장면마다 스토리의 구조, 대사, 특징, 소품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하지만 그것에 원류가 되는 영화는 반드시 존재했다. 지금에 와서 우리가 원조가 되는 영화에 감탄하는 것은 순전히 영화에 놀라서가 아니다. 그 시대에 맞춰 만들어진 새로운 감각 혹은 표현방식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감동과 감탄을 느끼기 때문이다. 비록 그런 영화들을 현대에 와서 보면 부족한 연출방식과 현재에 보이는 새로운 기술력에 비하면 아쉬울 수 있다.
특히나 유튜브 등의 다양한 매체가 영화를 스타일, 원조가 되는 장면을 편집하여 손쉽게 관객 앞에 떠먹여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관객은 생각한다. 굳이 내가 옛날 고전영화를 봐야 할까? 지금은 클리셰라고 부르는 스토리 예술의 반복되는 구조의 참신함에 놀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왜냐하면 예전 영화들이 보여줄 수 있는 원조가 되는 장면에 가치가 있다고 본다. 영화에서 변화했던 장면은 무엇이며, 왜 그 시대에 따른 장면들로 변화했을지 추측해 볼 수 있기에 영화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반드시 한 번은 히치콕 감독의 영화 ‘사이코’를 감상해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하필 왜 히치콕 감독의 영화이며, 왜 많은 영화 중에 ‘사이코’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박찬욱 감독이 언급하고 대표작으로 알려진 영화 ‘현기증’, 흑백영화이자 뮤지컬로도 알려진 영화 ‘레베카’, 혹은 영화 ‘이창’, ‘새’와 같은 영화는 어떠할까? 스파이 영화의 원조격인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는 어떠한가.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위상과 의미를 생각하면 어떤 영화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내가 선택한 영화 ‘사이코’ 보다 할 이야기가 많다.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히치콕이라는 영화감독으로서 완성시킨 현대영화의 교과서 같은 수많은 연출 방식과 스타일 그리고 스토리의 형태를 조합시켜 낸 거장의 영화에서 선택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영화 ‘사이코’는 히치콕이라는 이름을 가장 완벽하게 대칭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관객이라면 모두가 아는 영화 속에 샤워 장면은 잊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샤워 장면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 후반부에 나타나는 사건의 해결과 범인을 잘 모른다. 모두 그 장면만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관객의 대부분은 원조가 되는 영화의 전체적인 모습을 잘 몰라도 사용되는 반전과 표현을 모두 히치콕에 대비시켜 바라본다. 그리고 누구로부터 나온 것일까? 묻는다면 이렇게 답변한다. 알프레드 히치콕으로부터 나왔잖아.라는 참으로 단순한 논리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 장면이 영원히 기억되었기에 스릴러 영화는 지금까지도 원형을 유지한 채 많은 스타일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 장면을 그대로 지금에 와서 사용한다면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1998년 구스 반 산트의 리메이크작으로 기억되는 영화 ‘사이코’를 떠올려본다. 정말 최악일 것이다.
그래도 영화 ‘사이코의’ 원류에서 수많은 피부를 덧씌우고 만들어낸 새로운 스릴러의 실험적인 구조에서 안정적인 원형 틀을 관객에게 선보이면 관객은 꽤나 만족스럽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비록 새로운 형태와 스타일로 무장했다고 하지만 원조에서 느낀 공포는 잊을 수 없다. 반복되는 구도라고 비난해도 새로운 흐름을 하나만 넣는다면 영화는 나름대로 관객에게 반전의 매력을 안겨준 셈이다. 결국 시대가 바뀌어서 변한 것도 있지만, 원조가 되는 장면을 고스란히 이어와 영화에 투사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누군가는 새로운 반전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비난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했듯 모방을 통한 예술로서 영원한 사상, 감정 등의 모든 것을 예술로서 탄생시킨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우리는 반복되는 예술을 감상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모방의 창조를 통해 예술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히치콕은 완성된 원류의 모방품이자 스스로 완성된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