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궁지에 몰린 쥐는 치즈 꿈을 꾼다 by. 유키사다 이사오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많은 철학자들도, 심리학자들도, 언어학자들도 사랑이라는 것에 정의를 내리는 것에 굉장히 껄끄러운 태도를 보인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확인하고, 판단해야 할까?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일종의 기준이 있는 것일까? 정확한 판단이 어려워서 말하기 힘들다. 무엇이 사랑인가?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하는 행위, 인종 등의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추론하고, 결론짓기에 인간은 아는 것이 너무 적다.
다만 사랑하는 행위와 사랑하는 행동에 대해 많은 이들은 추측을 내리며 각자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내리려고 한다. 여전히 쉽지 않은 고난의 연속과도 같은 문제를 모두가 고민하지만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감성적인 예술에서 사랑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비슷한 답변일까 싶어도 한번 궁금해진다. 그래서 나는 영화 ‘궁지에 몰린 쥐는 치즈 꿈을 꾼다’라는 작품을 찾았다. 사랑을 정의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영화는 남자들 좋아하는 동성애자 후배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처음에는 협박에서 시작한 관계가 나중에는 미묘한 관계로 이어지고, 끝내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착각으로 정의 내려진다. 결국 영화를 모두 본 관객은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둘은 사랑한 것인가? 과연 정확하게 ‘그래도 둘이 사랑을 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거나 혹은 ‘결국 둘은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표출해도 나는 그 두 가지 의견 모두 맞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한 예시를 들어본다. 당신이 같은 성별을 좋아하는 동성애자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게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성별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성애자가 보는 사랑도 태도를 생각해본다. 사랑이라는 본질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사랑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성별을 떠나서, 젠더적인 문제를 떠나서 표면적인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의 본질을 들여다 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주한 영화는 꽤나 다르게 보일 것이다.
사랑은 표면적인 형태 외에 매우 원론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지점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해도 사랑이라는 표현이 전해진 것이지 사랑이라는 원론적인 형태가 완벽하게 이어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만큼 영화에서 보여준 쿄이치와 이마가세의 질긴 악연 같은 사랑은 지나칠 정도로 괴롭고 지쳐버린 형태였다. 동시에 사랑을 느끼는 한쪽이 치우쳐있고, 빗겨나간 상태이기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질긴 악연으로 이어진 동등하지 않은 사랑 관계의 줄다리기를 통해 사랑을 돌이켜보며 배웠다. 그리고 관객은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원론적인 의미를 엿본다. 한때는 이마가세가 떠났고, 쿄이치는 그런 자신의 사랑을 돌이켜봤다. 혹은 쿄이치가 상처 주고 이마가세는 돌아온다. 그렇게 헤어지고, 만나는 반복의 과정으로 사랑을 인식했다. 처음에 시작된 부적절한 관계의 역설은 둘에게 상처가 아닌 회복의 기회를 만든다. 동시에 사랑했던 만큼의 대가를 치른다. 두 사람이 모두 사랑했던 순간을 되돌려 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사랑을 끊임없이 시작하고, 끝을 잇는다.
그것은 결혼생활과도 비슷하다. 죽음까지 이어지는 결혼의 관계가 사랑의 연속은 아니다. 사랑은 어느 순간 끝날 것이고, 사랑이 아닌 무언가가 그 두 관계의 맺음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끝에 되돌려 받을 것은 없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항상 갈구할 것이다. 후회와 슬픔으로 인생이 뒤바뀔지 몰라도 사랑의 역사는 항상 그러했다.
매번 순회하는 반복의 길에서 우리는 실수를 배워도 다시 반복하는 다지선다의 고뇌에 빠진다. 마치 타락한 수도승의 의미 없는 염불과 같다. 그래도 인간은 굴레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사랑을 끝내고 나서 빈손으로 돌아와도 마찬가지다. 매번 구덩이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공포가 지배해도 그 순간의 빛이 있다면 사랑은 그렇게 의미 있어 보이게 만들어진다. 그리고는 다시 본질적인 역설로서 사랑을 묻는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어 스스로 순례를 자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