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니 데이 인 뉴욕 by. 우디 앨런
내가 중학교 혹은 고등학생이었을 때 도서관에는 항상 권장도서 목록이 붙어 있었다. 서울대에서 뽑은, 교수들이 뽑은 여러 가지 이유로 뽑힌 목차였다. 권장도서 목록 중에는 내가 아는 책도, 모르는 책도 있었고, 일단 이름은 들어본 유명한 책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권장도서는 연이 닿지 않았다. 사실 도서관에 자주 갔지만, 굳이 그 책을 찾아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매번 어렵거나 따분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늘 읽어야지라는 생각만 했다. 그러다 어느날 목차에 나온 소설을 한 권 빌렸다.
그때는 아마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빌렸을 것이다. 파수꾼과 호밀밭이 들어간 소설 제목. 책 표지도 하얀색의 분홍색 글씨가 디자인되었던 세계문학전집 ‘호밀밭의 파수꾼’을 끝까지 읽었다. 책은 얇고, 내용은 단조롭다. 주인공인 홀튼 콜필드의 짧은 어린 시절의 방황과 목적을 잃은 자의 숭고한 정신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을 품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영향을 주기 딱 좋은 책이었다. 그래서일까 '호밀밭의 파수꾼'을 그 뒤로도 몇 번 읽었다.
그때의 느낀 감정은 어른이 되었을 때 토대가 되어주지 않았다. 그저 잃어버린 단조로운 세계의 일원으로 성장해 버려서 사라진 추억의 통증 혹은 흉터이기만 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 왜냐하면 오늘 여러분께 하고 싶은 이야기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서사를 품은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한 시도였다.
바로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이다. 영화는 개츠비라는 어느 한 소년의 서사이다. 사랑하고, 이해받고 싶으며, 철이 없고, 부족하다. 자신의 의미를 완벽하게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과 사랑의 신념 등등 여전히 이 복잡한 뉴욕의 세계에 하루 동안의 시간을 기억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물론 파수꾼으로서 순수를 추구한 콜필드와는 전혀 다르다. 개츠비는 인생의 운명을 찾아 걸어간다. 비 오는 뉴욕에서 노래하고, 우중충한 세상의 자신을 맡겨, 스스로가 원하는 과정을 깨닫는다.
나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왠지 모르게 겹쳐 보였다. 이상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은 채 영화를 모두 봤고, 영화의 끝맺음에 나타난 결심과 의미에 대해 환호를 느꼈다. 그것이 비록 나만의 상상이라고 해도 영화가 만들어준 감동은 나만의 해석으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종종 비 오는 날마다 종종 홍차를 끓이고, 위스키 한 잔을 따르고, 간단한 쿠키를 준비한다. 빗소리를 듣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둔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영화를 상영한다.
영화의 볼륨은 조금 줄였다. 재즈가 나오는 타이밍에는 어김없이 소리를 높이지만, 뉴욕이라는 공간에 섞이는 현실적인 비 내음은 영화를 몰입시켰다. 각자 주인공들의 이유 있는 장면과 함께 들리는 재즈는 배경음악으로 적절했다. 우디 앨런 감독이 꾹꾹 담아내는 대사에도 한껏 취한다. 영화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사랑하며 영화를 여러 번 보다 보면 이제 나만의 해석마저도 흐릿해져서 보고 있는 순간을 즐긴다. 앞서 말한 영화관에서의 환호는 이제 내 귓가에서 떠나버렸고, 영화에 재즈만 뇌리에 박혀 들릴 뿐이다.
이제는 더 이상 영화를 비 오는 날에 맞춰 영화를 재생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름 영화가 주는 기억은 다행히도 ‘호밀밭의 파수꾼’ 때보다는 남아있는지 뇌리에 재생되어 비 오는 날을 즐기게 되었다. 콜필드의 바람처럼 파수꾼으로서 순수를 지키고자 했던 그날의 어린 나는 사라졌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의 뉴욕이라는 도심의 세상을 거닐던 한 남자의 기억은 다행히 아직은 남아있다.
언젠가 유년기의 끝무렵에 사라진 파수꾼의 운명처럼 영화 속에 개츠비도 공조하던 나의 기억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조금 더 간직하고 싶다. 비가 오는 날에 느낀 순수한 나 자신의 투명함을 간직한다. 재즈에 몸을 맡기면 가벼워지는 나 자신을 위해 다시 비가 내리고, 재즈가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