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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Mar 05. 2021

시리어스 맨

시리어스 맨 (2009)

코엔 형제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아직도 형제의 필모를 다 깨지 못했던 것에 약간 자책감을 느끼면서 고른 영화 시리어스 맨은 아이러니하게도 코엔 형제의 영화 중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던 영화라고 생각된다.


영화 시리어스 맨은 모든 것이 진중하고 평범하다고 믿었던 물리학 교수의 완벽하게 부서져버린 인생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부인은 이혼을 요구하고, 아이들은 반항기의 상태이며, 자신의 답 없는 남동생은 자신의 집에서 백수처럼 붙어살고 있다. 그리고 마초적인 미국 가정을 가진 이웃과의 마찰로 속을 끓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랍비를 찾아가기로 결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에 해답을 알려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렇게 복잡한 인생을 남자에게 요구하는 문제에 어쩔 줄 몰라하는 과정을 코엔 형제는 냉소적으로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삶에 대한 회한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며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지 못하는 교수의 울분을 토하는 모습은 최악이다.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물리학에서는 수학적 풀이를 이용해서 물리학적 정의를 규정한다. 모든 것이 답에 따라 증면되었다. 그것은 이미 세상의 모든 물질적 법칙에 의해 정의내려진 것이며 그가 풀어낸 수 많은 답안들 중에 하나였기에 그는 교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에 닥쳐온 문제는 어느 공식처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은 순진한 생각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남자의 인생이 문제였을까? 그것은 어느 누구도 뚜렷하게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자기 인생에 해답을 풀어내고 싶어서 랍비를 찾아가도 알 수 없었다. 랍비조차도 남자의 인생을 얘기 하지 않는다. 그저 인생에 놓인 또 다른 인생을 펼쳐놓은 것이 전부였다. 결국 교수는 자기 인생의 답안지는커녕 풀이 방식조차 얻지 못했다. 교수는 그들 모두가 헛소리 같은 대답으로 그의 인생에 대한 답변을 내린다.


그는 다시 자기 인생을 돌이켜 생각해본다. 유대인으로서 신에게 충성했다. 인생의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오로지 의심하지 않는 삶이 전부라고 믿었던 그에게 신은 왜 이런 문제를 내미는가? 아무리 대답을 원해도 랍비들의 답은 한결같다. 그것은 '신만이 알고 있다.'이다. 만약에 이런 서사를 지닌 보통의 영화였다면 교수는 점철된 인생을 해결하고자 복잡한 선택들을 결정할 것이다. 이혼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자기 직장에 대해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코엔 형제의 영화 시리어스 맨에서 인생은 그가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결정되어 버렸다. 이혼하기로 한 부인과 문제도, 자기 직장도, 동생에 대해서도 인생이 자기가 복잡하게만 여겨졌던 문제들이 또 다른 문제들의 해결책이 되어버린다. 그가 신에게 기도하듯이 순종하고 끌고 간다고 믿어온 인생은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끌고 간다. 인생의 절반밖에 모르던 그에게 진실에 가르쳐주고 울먹이던 그에게 냉소와 유머를 내밀며 인생은 그에게 다시 문제풀이를 강요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욥기의 이야기처럼 신이 시험이라도 하듯이 그에게 닥쳐오는 수많은 불행과 고통스러운 인생에 대해서 코엔 형제는 날 것의 형태로 영화를 만들어 놓고 바꿔버린다. 안타깝게만 느껴지던 감정은 허무한 웃음 속에 사그라든다. 코엔 형제는 영화를 뒤집었다. 그들은 왜 이런 선택을 하였는가. 그들이 만들어낸 영화 시리어스 맨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가? 신이 내리는 잔혹한 운명에 대한 종교적인 철학으로 남자를 신성하게 만들고 싶은 건가? 인생에 대한 비판적 주제의식을 위해 이런 결말로 우리에게 주었는가? 


내 생각으로 코엔 형제는 그 무엇도 정의 내리지 않은 채 이 영화를 보여주었다고 믿는다. 신에 대한 해석, 종교적 성찰을 통해 하루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인간의 발칙한 바람과 다르게 인생은 방대했다. 불확실한 영역에 속해진 양자역학의 세계처럼 우리에게 닥쳐올 인생에 대해 신, 과학 나 자신에게 물어도 소용없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자기가 직접 인생의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고양이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무력한 인간이 믿어왔던 신조차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신이라는 존재는 그저 종교적인 믿음의 보조적인 수단이다. 나의 불확실한 인생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내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영화는 인생에 대한 모든 것을 표현한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에 뻗혀버린 것 마저도 인생이기에 그저 무방비하게 흘러가는 과정마저도 영화 속에 담겨져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매번 알고 있다고 믿는다. 신을 통해 느낀다며 종교를 찬양한다.  내 인생에 대한 수 많은 회의감이 들어도 무엇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생은 정확한 게 아니다. 그렇기에 코엔 형제는 영화 시리어스 맨을 통해서 '인생은 그냥 그런 것이다'라는 진중한 대답을 건넬 뿐이다.


점수 : 4.5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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