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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Apr 14. 2021

[극장에서 본 오늘의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릴리 슈슈의 모든 것 (2001)

이와이 슌지의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이와이 슌지를 대표하는 영화이기도 하며 이와이 슌지가 가진 감성의 한계성을 풀어낸 영화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묻기도 한다. 그의 세계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고 싶다고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이와이 슌지의 세계를 정의 내리기에는 우리는 받아들일 것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 속에 서사는 단출하다. 무언가를 크게 입고 나오지 않았고 화려한 치장도 없다. 돋보이는 세계는 어울리지 않다는 듯이 서사는 짜여 있고 누구나 서사에 흥미를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무엇이 이와이 슌지를 이렇게 만들었는까를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바로 서사 위에 층층이 덮어둔 감독의 무의식적인 표현들이다. 장면마다 고정된 카메라와 핸드그립을 이용해 흔들리게 찍은 카메라의 연속과 배경의 조화는 영화에 스며든다. 


그 덕에 영화를 보는 내내 폭력의 직관성을 알아채기 어렵다. 폭력의 직접적인 사용에는 환상처럼 흔들리는 장면과 흐릿해진 시야 혹은 부자연스러운 배경의 연결을 통해 완성시킨다. 하지만 영화가 이것 만이 전부였다면 감독의 영화 세계를 찬양하는 이들도 찬양해줄 대상도 없었을 것이다. 장면의 기묘한 모습과 더불어 사용되는 음악의 연출은 감독이 가진 영화의 이상향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90년대 청소년들의 방황과 혼란의 시기를 인터넷의 활용과 존경하는 존재의 환상을 이용해 만들어낸 작품이다. 릴리 슈슈라는 우상 같은 존재를 따르며 음악적 에테르를 말하는 릴리 슈슈를 사랑하는 이들은 이렇다. 그러나 릴리 슈슈의 음악적 세계의 찬양과 무한한 세계 너머에는 폭력의 답습이 기다리고 있다. 중학생이 되었던 하스미에게 친구가 되어준 호시노에게서 폭력의 굴레로 족쇄가 채워진다. 자신도 발버둥 치지만 그러할 수 없다. 폭력은 연좌제처럼 자기의 주변까지 덮쳐오면서 자신을 폭력의 가담한 방관자로 만든다. 폭력은 늪처럼 자신을 빨아들일 뿐이다. 


완전한 자유를 향해 노래하는 릴리 슈슈의 음악과는 전혀 딴판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우주만물에 뿜어지는 에테르의 형상에 빠져들지만 현실은 다를 바가 없다. 끝내 에테르의 근원지에서 자신을 정의하고 순수한 존재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채우고자 하스미는 라이브 공연장으로 간다. 그러나 에테르의 순수한 힘은 호시노에 의해 붕괴된다. 자신을 폭력의 세계로 밀어놓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향해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는 도망친다. 영화의 결말까지 영화는 폭력과 진원 속에 갇힌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서 마주한 소녀와 드뷔시는 방관자인 자신에 대한 용서이자 에테르의 순수성을 되찾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폭력의 강도가 심해지고, 친구에서 부하로, 방관자로, 피해자로, 그리고 가해자로서 하스미의 역할은 호시노와 결을 같거나 달리한다. 둘은 다른 것처럼 보이고 일방적인 존재로만 보이지만 오히려 영화는 그 둘의 존재를 패러렐의 세계처럼 그려준다. 둘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는 하스미에게 호시노에게 각기 다른 결과를 안겨준다. 그들의 결과를 달라 보인다. 호시노는 폭력을 통해 얻어낸 승리를 하스미는 방관자로서 지키지 못한 자의 죄책감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얻어낸 세계는 동일하다. 단지 표면적인 상황이 그 둘을 갈라놓았을 뿐이다.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또 다른 세계의 하스미와 호시노 일 뿐이다. 


그리고 결과에 책임을 얻는 과정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바로 공통적으로 릴리 슈슈를 등장시켜 자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를 숨기고자 한다. 그렇게 릴리 슈슈를 사랑하지만 여전히 호시노와 하스미가 이룩해낸 평행세계의 폭력은 끝을 내지 못한다. 오히려 릴리 슈슈라는 동일한 존재로부터 일상을 탈출하고 싶을 뿐이다. 길게 뻗어진 들판 위에서 헤드셋과 CD플레이어를 들고서 현실의 너머로 구원을 바 한다. 몇 번을 듣지만 음악이 멈춘 순간 되돌아오는 고통은 매섭다. 그들이 외치는 릴리 슈슈에게는 잠시 동안의 해방이 주어질 뿐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릴리 슈슈의 찬양은 조금씩은 다르지만 호시노와 하스미에게만 찾아오지 않는다. 츠다와 쿠노에게도 폭력의 길들여진 존재와 폭력의 대상자에게 다가선다. 동시에 방관자였던 하스미에 의해 만들어진 그들은 릴리 슈슈를 통해 의미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릴리 슈슈는 그들에게도 일부일 뿐이다. 하늘을 날고 싶은 츠다, 폭력의 맞서 현실로 돌아온 쿠노에게도 릴리 슈슈와 드뷔시는 일부일 뿐 그 너머의 현실의 존재를 자각해야만 했다. 그렇게 선택된 둘의 또 다른 결과는 하스미에게도 호시노에게도 닥쳐온 세계의 변동이었다. 결국 하스미는 방관자로서의 자신에게 다가온 결과를 현실에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까?  


그는 여전히 릴리 슈슈의 세계로부터 탈주를 원했다. 그곳에 에테르가 넘치는 세계로 찾아간다면 이 모든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찾아간 릴리 슈슈에게는 이미 구원을 위해 에테르를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릴리 슈슈를 찬양했다. 그렇게 믿었지만 릴리 슈슈의 자신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구원을 받을 대상자들의 일부이자 그 한순간에 짧은 기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과 평행한 호시노가 곁에 있었다. 과연 릴리 슈슈는 나를 해방할 수 있는가? 이 짧은 물음을 이용한 감독의 발칙한 결말은 관객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다만 아직 끝난 것은 전혀 없다. 릴리 슈슈는 여전히 음악을 활동했다. 하스미라는 소년은 학교에 다녔고, 딴생각이 들었지만 일상 속에서 현실을 마주하며 지낸다. 폭력의 구원이 찾아왔을까?라는 관객들의 물음을 지워버리고 하스미는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그저 살아있다. 그것만이 전부인 세계에서 관객들은 하스미에 대한 동정, 안타까움 복잡함 심경으로 그를 쳐다보지만 그는 그저 살아있다. 그렇게 고약했던 세계는 어떻게 진행될지도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알 수 있다. 드뷔시를 치는 쿠노를 릴리 슈슈의 에테르를 통해 그는 성장할 것이다. 다만 그와 완전한 성장을 한다고 말해 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성장할 것이다. 


무엇을 가슴에 품고 있든 간에 중학생 때 겪어 본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말이다. 참혹하게 짓밟은 이와이 슌지의 세계는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그래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라는 영화를 보고 났을 때 릴리 슈슈가 무척이나 그리울지도 모르겠네 라고 생각한다.     


점수 : 4.5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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