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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Apr 21. 2021

[극장에서 본 오늘의 영화]
홍등

홍등 (1991)

장예모 감독의 초기 4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붉은 수수밭, 귀주 이야기, 인생 그리고 홍등을 보면서 장예모의 영화에 반하게 되었다. 그만큼 뛰어난 영화감독 장예모는 뛰어난 영화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다만 그의 초기작이 끝나고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렇게 완벽했던 영화는 사라지고, 후기작의 실망스러운 영화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영화 홍등은 나에게 있어서 평생 잊지 못할 영화라고 생각된다. 


영화 홍등은 중국이 개방된 직후에도 남아있는 봉건제도의 뿌리 깊던 관습과 가부장제를 지속해오던 유서 깊은 가문에 넷째 부인으로 시집을 가게 된 송련의 이야기를 담았다. 청나라의 말기부터 중국이 이미 서구화가 돌입했으며 언제나 무시받던 여자도 대학을 나오는 시대에도 그들은 자유롭지 못했다. 아무리 대학을 다녀도 여성의 한계는 뚜렷했기에 그녀는 계모의 압박에 중퇴를 선택하고 진 어른댁에 입성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부인이 아니었다. 가문의 위상과 가문의 법도라는 관습을 배워야 했으며 모든 것이 남편에게 권한을 위임받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중에서도 그녀들은 저녁마다 자신의 집 앞에 홍등을 두고 남편인 진 어른이 직접 잠자리를 가질 여자를 고른다. 고작 그 하루 동안의 남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녀들은 소리 없는 싸움을 지속한다. 다만 홍등은 단순히 남편과의 잠자리가 아니다. 가문의 권력이며 집안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선보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침묵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사이에서 일어나는 질투와 시기 그리고 모략을 써서 홍등을 켜고자 했던 이들과 달리 송련은 그런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가문의 비이성적인 방식과 가부정적인 사회에 숨 막혀한다. 그녀들을 무시하지만 가문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에게 더 많은 질투를 심어주고 인간으로서의 의지마저 점차 사라지게 만든다. 가문 속에서 변화를 추구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오히려 그녀는 홍등을 가볍게 여겼던 자신의 과거와 달리 필요 이상의 집착과 욕망을 품는다. 그렇게 그녀의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이 권력을 그리고 가문에 속한 첩들로부터의 싸움에 이기고자 그녀는 위험한 도박을 벌인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이 들통나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체벌을 받는다. 결국 가문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관습과 가법이라는 이유로 늙은 남편의 첩이 되어 자유롭지도 못하고, 집안 내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방법에만 집중해야 했다.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 모든 이들이 그녀의 적이 되었다. 사랑하는 상대조차도 그녀를 구원해줄 수 없다. 그저 낙심한 마음만을 가슴에 품은 채 침묵으로 일관한다.  


영화 홍등은 가부장제라는 사회의 모습을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얽매인 관습에 휘둘리는 여성의 삶을 담았다. 동시에 중국이라는 사회에 속해진 관습을 영화 속에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서구화라는 명목 속에서 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겨진 중국만의 굴레는 영화의 여성들의 삶을 넘어 사회 전반적인 모순에 대항하는 자세를 보인다. 가문의 법도를 지키지 않았다며 사람을 강제로 죽이거나, 여자와의 잠자리를 고르는 전근대적인 가문의 법도는 비이성적이다.  


다만 그 비판의 대상은 가부장제의 당사자뿐만 아니다. 선대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던 가법과 예절을 바탕으로 이를 이용하려는 자들의 욕망또한 문제가 되어 드러난다. 하인이면서도 첩이 되어 권력을 누리려는 소녀, 홍등이 켜진 방에만 충성하는 하녀와 하인들이 있다. 그들은 권력에 침묵했다. 오히려 권력에 줄을 대고 권력에 딸려지는 이익을 취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싸움을 부추긴다. 가문의 예법을 들먹이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노력했다. 


마지막에 주인공 송련이 벌인 사건으로 가문의 파탄이 일어날 지경에 이르는 사건을 만들면서 가문을 전면으로 비판했다. 그렇게 장예모는 시대상의 전면에 돌격한다. 그러나 영화의 끝에는 다시 가문의 회귀였다. 진 어른은 다시 결혼을 하였으며 가부장제로부터의 뿌리는 침묵 속에 감추어진다. 그렇게 현대로 넘어갔지만 여전히 전 근대적 관습을 담아낸 영화였다. 동시에 관습을 잘라내려는 노력을 하더라도 그 뿌리를 바꾸지 못했다.여전히 비극과 절망이 다시 반복되었다. 


구체제의 관습 속에서 중국 사회는 과연 변화는 삶이 없음을 비판한다. 특히나 영화는 90년대에도 변하지 않을 중국의 관습에도 도전했다고 생각된다. 청나라의 멸망 이후에 정치적 세력이 나타났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는 변화되지 못한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출몰했고, 많은 사람들의 믿음과 다르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변화를 위해 싸웠던 시민을 탄압했고 공산당의 관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무런 일도 남지 않도록 만든다. 모든 변화가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시대에 맞춰 변하지 않고 관습이라는 이유로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살아간다면 결국 고여진 물이 썩어서 더 이상 못쓰게 되는 상황이 올 것이다. 마치 지금의 중국 또한 그때와 다를 바 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제는 역사 속에 사라져야 할 홍등의 불은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그들만의 믿음을 풍자한 선택은 탁월했다. 


그러나 장예모의 영화는 이로써 막을 내린다. 공산당의 속해진 감독은 더 이상 홍등을 비판하는 인물이 아니다. 홍등의 옆에서 아니 홍등을 들고 마님의 문 앞에 서있는 일개의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그의 후반기 영화를 보면서 돌아오지 않을 그리고 홍등을 끄지 못할 장예모를 볼 때마다 종종 슬픔을 느낀다.


점수 : 5.0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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