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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Apr 28. 2021

[극장에서 본 오늘의 영화]
파수꾼

영화 파수꾼은 보려고 했지만 계속 미루다가 드디어 극장에서 본 영화이다. 영화는 보는 내내 긴장과 분노 그리고 처절한 관계를 형성시킨 세 인물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누가 옳았는가는 필요 없다. 서로의 선택이 맞물리면서 끝도 없는 파국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파수꾼이라는 데뷔작 이후에 사냥의 시간이 극장에 올라온 순간을 기억한다. 결말의 파국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영화 파수꾼은 기태라는 인물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결정을 왜 했는가? 기태의 아버지는 언제나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를 찾아다니면 질문을 던진다. 왜 기태는 자살했는가? 그의 선택이 시작되기 전의 과거를 퍼즐처럼 하나씩 꺼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친구의 관계를 꺼내는 에피소드가 마냥 즐겁지는 않다. 


오히려 폭력으로 서열이 정해지고, 복종하는 비이성적인 관계를 친구라고 부른다. 하지만 누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기태라는 인물이 폭력을 사용하지만 하지만 피해자로서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안타까운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의 죽음이 가해자로서의 처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스스로 모든 것을 경계하면서 스스로를 학대한 결과처럼 보인다. 


피해자로서의 희준은 기태에게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분명히 폭력으로 상처를 받아 괴로울 테지만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를 모두 끝내버리고, 복종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보다 반항과 방어기제를 내민다. 때로는 관계에 대해 반격하여서 기태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일조한다. 그렇다고 그가 가해자인 것은 아니다. 피해자로서 온전한 것도 아니다. 관계를 연결하던 불안정함이 폭발하면서 생겨난 결과이다. 


친구라고 하지만 그 둘의 관계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불편한 벽이 있었고 벽을 허물 기회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태는 복종으로 친구사이를 이어갔다. 내가 원하는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만약 부하를 원했다면 쉽게 얻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관계가 깨질 것이 두려워서 만들어낸 학대의 결과물로 보인다. 


그렇게 이준과 기태의 관계는 전학으로 끝나고 남은 것은 동윤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동등했다. 오히려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우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묘하게 들어온 희준의 존재와 폭력이 관계 속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서사는 바뀌게 된다. 서로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되면서 말이다. 동윤에게 기태는 기태의 운명을 결정한 가해자였고, 기태로부터 자신의 여자 친구를 공격하게 만든 피해자였다. 


서로가 동등한 관계였던 만큼 시작한 폭력의 범위는 점차 감당하기 어려운 형태로 변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 보다 서로를 죽이겠다는 심정뿐이다. 그렇게 나타난 결과는 살아남은 자의 후회로 이어졌다. 무엇이 옳은지 아직 알 수 없었던 10대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처럼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 세 사람에게서 왜 내 자식이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고 싶다. 그런 기태 아버지의 등장은 퍼즐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원칙적으로 찾고 싶어 한다. 누군가를 원망할 대상이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찾아갈수록 원망할 대상은 보이지 않는다. 기태와 동윤 그리고 희준이 가슴속에서 폭력과 학대로 인해 남겨진 흉터를 본다. 그리고 고통을 되새김질하는 것이 전부였다. 


만에 하나 폭력이 아닌 솔직한 관계라면 세 사람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10대라는 복잡한 형상을 폭력 대신 진심 어린 사과로 전달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툴렀고, 아무것도 몰랐다. 오히려 자기만 생각하는 오만한 태도가 파국을 불러왔다.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실수였지만, 실수를 바로잡는 것도 인간의 역할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실수했지만, 그것을 몰랐거나 모른 척하면서 순간을 모면했을 뿐이다. 


나는 영화 파수꾼을 통해서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이들의 절망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인터넷 사회를 통해서 익명 속에서 소통을 추구한다. 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하는 대답은 거칠거나 오만하다. 그렇게 해도 내 인생이 피곤해지기는 해도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생애 직접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소통은 복잡하다. 서로를 존중하거나 헐뜯거나 폭력까지 사용한다. 그러다 보면 인생의 변화는 한순간이다. 내가 의지할 대상이 사라지고, 나는 위태로운 상태에 놓인다. 그저 남들이 다하는 소통임에도 말이다. 


점수 : 4.5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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