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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Jun 23. 2021

현대인을 위한 유목민 생활백서

노매드랜드 by. 클로이 자오

노매드랜드 (2021)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잃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가 일으킨 대참사였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자신의 트럭과 다양한 종류의 차를 이용해서 미국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매 순간이 불편하고,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집이 없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언제나 불편하다. 하지만 그들은 살고 있는 집이 없을 뿐 가정은 존재한다. 영어에서 HOME이라는 단어와 HOUSE라는 두 의미적인 차이는 크다. 그래서 영화는 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되묻는다. 집은 살고 있는 공간인지 아니면 나와 같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위한 장소인지 말이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미국이라는 사회의 경제적 문제로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집을 구매하기보다는 떠도는 유랑민 생활을 통해 스스로 유목민이라고 자처한다. 인류의 유목생활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유목생활을 지켜가는 이들은 존재한다. 그래도 대부분의 현대사회에서 유목민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집을 잃은 그들은 스스로 현대의 유목민이라고 자처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영화 속의 주인공 펀도 이런 유목민의 삶에 동참한다. 다만 자신이 좋아서 하게 된 자발적인 삶은 아니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은 쇠퇴했고, 남편은 병으로 사망했다. 홀로 남은 그녀에게 남은 기회라고는 이런 방법이 전부였다. 이것이 삶을 바꿀 기회인지 아니면 지독히 불행으로 결정한 선택인지 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복잡했을 것이다. 하지만 펀은 자신의 트럭을 타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땅을 찾아다닌다. 


영화는 펀의 외면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유목민의 삶을 다루는 것 같다. 미국의 불공평한 세상과 환멸 나는 자본의 악습이 숨 막히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주장처럼 들린다. 하지만 영화 속을 깊이 파헤쳐보면 주제의식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빈부격차의 문제로 처음에는 유목을 시작했다. 하지만 점차 그들은 다른 이유를 만들어서 전국을 떠돌고 자기 삶을 결정했다. 떠돌아다니는 삶 자체를 자신의 새로운 인생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자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언제나 변화가 일어난다. 갑작스러운 경제적 문제, 사회적 결정들이 만들어낸 결과가 내 삶의 보존되어있던 공간을 타인에게 양도한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지점에 정착해서 새로운 직업과 만남을 시작한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생기는 것이다. 새로운 삶이 기존의 공간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며 삶을 꾸려나가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정착했다고 믿지만 다시 유목하는 삶으로 돌아갔다. 


영화에서도 펀도 처음에는 자신의 붕괴된 인생을 집착한다. 과거에 연연하며 일단은 살기 위해 유목을 선택했다. 하지만 수많은 지점을 방문하고, 사람을 만나며 자신의 삶이 영원히 정착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놓아버린다. 그렇게 과거라는 척박한 곳을 떠나서 새로운 삶을 도전했다. 다만 펀의 경우에는 물리적인 이동도 있지만 정서적인 떠남도 영화의 큰 메시지로 보였다. 누군가의 죽음 혹은 어떠한 이유로 느끼는 감정의 응어리로 가슴에 품어진다. 


내가 마음먹고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면 절대로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과거라면 인간이 오래 살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그리움을 품을 시간이 짧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너무나도 긴 시간을 살아가며 과거를 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의 우리는 새로운 삶을 건너뛰고자 몸부림을 친다고 믿는다. 그것이 유목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공간적으로, 마음속에서 떠나버리고 새로운 집에서 살아간다. 제삼자에게는 매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는 너무 오랜 시간을 지속하고 있고 오랜 여정을 버티기 위해 유목을 선택했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현대로 올수록 집의 의미가 유독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우리가 집이라는 공간을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디에 살던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꾸린 공간에서 내 생활을 영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은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비유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지금 사회는 '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치환할 때 다르게 사용한다. 더 이상 HOME은 나의 주거공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그 자체가 나의 집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같이 관계를 맺은 공동체와의 형태가 '집'일 수도 있다. 


우리가 공간에서 생활하는 실질적인 집은 부동산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나의 집은 생활하는 공간이 아닌 내가 투자한 재산의 일부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일부 사람은 정착하던 삶에서 다시 유목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한 공간에 머물면서 정착을 굳게 믿고 살아간다. 어떠한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삶은 각자의 이유가 있고 존중해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들이 새롭게 증가되고, 우리의 삶이 더 많이 길어진다면 유목민의 삶이 정당하다고 믿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영화가 끝나고서 내가 살고 있는 집도 고민하게 되었다. 앞으로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혹은 정서적으로 떠날지도 모른다. 그런 유목 행위가 결정되었을 때 느낄 감정과 결과에 대해 고민도 해본다. 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결국은 나도 유목을 할 때가 올 것이다. 그 과정에 고민하거나 얽매여서 고집을 부려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의 나는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도 생각한다. 영화 속의 펀처럼 말이다. 


그녀도 쉽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결국 자신을 이겨냈다. 나도 또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 변화되지 않는 것은 없기에 닥쳐온 상황을 이겨내야 한다. 많이 어렵거나 불안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수렵생활을 하던 고대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이자 유목생활을 했을지도 모를 나의 조상들의 유전을 믿고 용기를 낼 것이다. 어쨌든 유목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점수 : 4.0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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