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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Jul 28. 2021

아직도 불쌍한 사람들

레미제라블 by.레쥬 리


1862년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을 출판했다. 거기에는 프랑스에 살고 있던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빵 한 조각을 훔쳐 감옥에 가기한다. 공장에서 억울한 누명으로 쫓겨나 매춘의 길을 걷게 된 여성도 있다. 혁명의 불길을 기대했지만 파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자본가에게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였다. 그들이 안타까워도 동정심 밖에 느낄 수 없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19세기의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의 프랑스라는 국가에서 벌어지는 불쌍한 자들의 운명이다. 특히나 레미제라블과 혁명이 일어났던 도시에서 일어난 불쌍한 자들의 탄압과 폭력은 바뀌지 않는 시대상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혁명과 선거를 수 없이 거쳐왔다. 하지만 시민의 힘이 영향력을 발휘했을까 생각하면 말하기 힘들 것이다. 언제나 선거를 진행하고 국가의 수반을 선택했다. 하지만 시민이 선거권을 가지고 있어도 그들은 선거기간을 제외하고는 무시당한다. 


정부는 합법적인 폭력을 내밀지만 폭력의 수위는 그때마다 달라진다. 그러나 시민권조차 없는 이민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문화와 인종이 다른 이민자의 목소리는 정치적 발언이 아니다. 정부에게는 그저 탄압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민자들의 행동과 문제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경찰의 노고도 필요하다. 그들이 범죄와 엮어지면 도시는 무법천지가 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 개입할 수 있다. 절차와 규칙에 따른 과정을 거쳤을 때 말이다. 하지만 레미제라블들에게 영장을 심사하거나 폭력적인 제압을 하거나 경찰이라고 드러내는 규율은 전혀 없다. 오로지 이민자라는 이유로 얻게 되는 꼬리표와 폭력이 주홍글씨처럼 따라붙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항상 당하고만 있을까? 그건 아니다. 이민자 네트워크를 통해 소리치고는 한다. 그들이 바라는 요구사항과 이민자로서의 가치를 말이다. 하지만 끝내 일어나는 것은 정부의 폭력과 불쌍한 자들의 폭력이 정면 대결할 뿐이다. 그리고 언론은 이민자를 폭력적인 존재로 상징하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도 달라지는 것은 표지판을 세우는 것 밖에 없다. 하지만 끝난 뒤에도 남은 충격과 상흔은 가시지 않아 곳곳에 남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폭력적인 상황으로 한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한다. 


서로 다른 이민자 사회를 배척하고, 때론 정부와 손을 잡아 그들을 억압한다. 한 아이의 경찰에 의해 다쳐도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에 경찰을 몰아낼 수 있는 증거품을 찾아내어 자신의 이익을 증폭시키려고만 한다. 거대한 혁명의 물결 대신에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권력에 충실한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삶도 알고 있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고 사회가 있다. 각자 나름의 사정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옳지 않은 것을 주장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부는 당연히 사건을 은폐해야 하지만  불쌍한 자가 불쌍한 자에 의해 침묵당했다. 그들은 세상을 조금 더 안전하게 살아가는 협정과도 같다며 자신들의 비겁함을 숨겼다. 


다만 영화는 꺾인 정의를 품은 채 끝내지 않았다. 숨겨진 진실과 은폐한 결과는 평화의 상징이 아니라 폭력의 발화점이 되었다. 항상 무시당했던 그들의 목소리는 화염병과 바리케이드로 장식되어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분노를 숨겨왔던 사회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폭력이 시작되고 불안과 분위기에 고조되어 영화는 빠르게 진격하는 것 같아도 윤리적인 관점을 빼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폭력으로 인해 부상당하거나 죽는 사람도 속출할 것이다. 도시는 마비가 되고 일반 시민은 불안에 떨 것이다. 제대로 된 폭력이 수습되지 않으면 결국 또 다른 범죄자들의 소굴로 양상 된다. 


그렇기에 폭력이 진행된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선택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지라는 게 있는 것인지도 고민해본다. 폭력이 아닌 다른 과정을 통해 불쌍한 자들의 삶을 개선하고 존중해야 했다. 그들이 목소리를 내도 듣지도 않는다. 그저 짓밟으면 그만이라는 정부의 이기적인 행동에 선택권도 없이 싸운다. 그럼에도 폭력은 결코 정당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여실 없이 드러낸다. 서로 간의 합의점을 찾고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인간인만큼 그러한 결과를 도출하고자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정부도, 경찰도, 네트워크도 자신들만의 평화에 사인만 했을 뿐이다. 일어나는 사건도 마찬가지로 합의에 따라 감추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회에 한 일부로서 살아가지만 때론 사회의 단체가 되어 행동한다. 레미제라블은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의 개인으로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억울한 사건과 분노가 모집되면 집단으로서의 광기가 일어난다. 그만큼 사회는 개인들의 모집체이지만 하나의 존재와도 같다. 그래서 그들과 대화하고 합의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결과는 집단의 폭력이 걷잡을 수 없게 될 뿐이다. 그렇기에 그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도 대화는 필요하다. 그들이 어쩔 수 없다는 핑계가 아니라 진짜 대화 말이다. 


물론 대화가 모두 통하는 것은 아니다. 결렬된 대화는 폭력으로 다시 번질 때도 있다. 하지만 폭력이 단순하게 불 피워질 때와 대화로부터의 협의가 끝난 직후에는 다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대화를 멈출 수 없고, 합의점을 찾고 사회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도 대화가 사라지고 결과로 도입되면서 거접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걸 수습하는 과정이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화하고 수습하며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더이상 불행한 레미제라블이 있어서는 안되게 해야 할테니까 말이다. 


점수 : 5.0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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