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 - 크리스타인 펫졸드
나의 외모가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지면 나의 정체성도 달라질까? 나를 알아볼 수 없어도 나의 손과 발과 신체의 모든 것이 '나'이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나와 똑같은 모습을 가져도 나는 이제 내가 될 수 없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영화 피닉스는 세계 2차 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이 끝난 직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여인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얼굴이 망가져서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여인은 자신이 예전과 전혀 똑같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나를 알아볼 수 없고,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져서 정확히 내가 누군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살아가는 형체만 남아있다. 여인의 비극적인 인생과 정체성은 참으로 복잡해 보인다. 영화는 그런 여인을 통해 의미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항상 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1인칭 주어로도 쓰이고, 존재에 대한 정확한 정체성을 표현에도 사용된다. 혹은 자신을 소개할 때도 당연히 '나'를 사용한다. 나는 곧 자신이며, 정체성을 가진 존재이며, 필연적인 형태이다. 하지만 나를 존재시키는데 무엇이 과연 필요할까? 일단은 외모가 먼저일 것이다. 아름답던, 추하던 말이다. 일단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개성을 가진 외모가 필요하다. 눈과 코와 입이 있다고 '나'가 될 수 있지 않다. 모두가 똑같지는 않은 눈을 가지고 상대를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나'입니다.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나서 상대는 나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외모는 인식했을 뿐이다. 나라는 존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남들에게 나의 모습이 인식된 순간 나의 주변적인 것을 찾는다. 목소리, 발걸음, 꾸미는 방법, 의상까지 나를 상징하던 것들을 바탕으로 '나'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전쟁 속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는다. 포격의 잔해 속에 나의 물품이 사라져서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씩 얻어낸 과거는 나를 만들어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나를 되찾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런 과거를 받아들인다고 나를 인식할 수 있을까? 과거의 나를 모방해도 지금의 나를 받아 들 일 수 있을까?.
과연 이렇게 힘겹게 얻은 결과물이 옳은 것일까도 생각이 든다. 글씨체를 따라 쓰고, 즐겨 입던 옷을 입고, 신발을 신어도 나는 과거를 되돌아갔을 뿐이다. 내가 언제나 그리워했던 과거의 나를 되찾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를 완벽하게 정체성으로 구축했다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노래하며 음악을 즐기고, 친구들과의 삶에 흠뻑 빠 져지 냈던 낭만적인 세태의 그리움만이 묻었다. 과연 그렇게 묻은 과거가 나를 누구인지 알려 줄 수 있는지 모른다. 과거의 모든 것을 다시 불러와도 불안정하다. 왜냐하면 과거를 통해 얻어낸 나는 모방일 뿐이다. 본질적인 나는 아니다. 다시 처음부터 나를 이야기해야 한다.
결국 과거의 외모와 모든 것을 모방해도 나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화려한 삶과 가족이 있던 평화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의 낭만은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 나를 되찾으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은 있다. 하지만 이미 정체성을 찾아도 남들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과거를 배제한 형태의 '나'이다. 끔찍한 시대라는 이유로 나치를 부정하고, 전쟁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과거에 해온 형태를 연극하듯이 표현할 뿐이다. 그래도 나는 정체성을 찾아야만 한다. 아니 나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쉽지는 않은 일이다. 없었던 나를 다시 정의하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럼에도 내가 스스로 정의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과거의 모두는 나를 죽였다. 배신하고, 침묵했기 때문이다. 나의 외모가 지워졌고, 생사가 불분명해지고, 다시 현재의 나를 부정당했다. 삶의 잔인함과 비극에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게 되었다. 과연 내가 무엇인지 이제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전쟁 속에 파묻혀버린 과거가 나일까? 전쟁 이후로 모방한 나를 의미하는가? 이도 저도 아닌 비참한 삶과 배신을 경험한 정체성 없는 나인가? 혼란스러움 속에 결국 그녀는 선택했다.
그녀가 선택한 정체성이 어떠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생존자로서 그녀가 겪은 수많은 것들이 과거를 모방한 자신을 대체했다. 똑같지 않은 외모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었다. 과거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지만 달라졌다. 성장을 배경으로 달라졌다면 감사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될 수 없는 아이러니를 겪는다.
어제의 나는 어제이고, 오늘은 어제를 버린 채로 나를 만들어야 했다. 비극적인 순간을 그녀는 감당해야 했다. 이는 전쟁보다 더 비참하게 느껴진다. 삶을 감당하는 무게만큼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 내리는 것의 무게도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과 다르게 느껴진다. 피해자로서 억압받은 심정과 고통을 섬세하게 다룬 영화와 달리 내면에서 잃어버린 나를 단단하게 다시 응축하는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점수 : 4.0 /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