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마을의 푸펠 - 히로타 유스케
1633년 로마에서는 과학자를 향한 종교재판이 열렸다.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 종교는 그것이 진리라고 설파했다. 하지만 한 과학자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로마로 소환되어 종교재판의 피고로서 참여한다. 그리고 그는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그의 주장을 부정한다. 대신 재판정에서 과학자는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며 말을 번복한다. 그렇게 재판이 끝났다. 그의 이름은 갈릴레이 갈릴레오였다. 그렇게 과학자의 절대적인 진리는 후세에 밝혀져서 못 박혔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모두가 그것을 배척하고, 거부했다. 그것이 다수가 생각하는 진리라는 이유였다.
영화 굴뚝 마을의 푸펠은 갈릴레이 갈릴레오처럼 거대한 진리를 발견한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하늘에 언제나 떠있는 별을 봤다는 이유로 탄압당한 브루노와 그의 아들 루비치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보고는 한다. 하지만 굴뚝 마을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들에게 별은 연기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로 자욱한 마을이 곧 진리이자 전부였다. 그 외의 것은 모두 이단이었기에 그들은 언제나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래서 브루노가 봤다는 별에 대해서 언제나 적대감을 품었다. 그러나 브루노의 이야기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은 이단이었다. 쓰레기 사람도, 거대한 배도, 바깥세상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모두 보고 나왔을 때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이야기가 새삼 먼저 떠올랐다. 인간은 매번 자신의 알고 있는 범위에서만 의미를 찾거나 자신감을 가진다. 하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는 경계하거나 거부한다. 어떤 이는 용기 없는 자의 변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모두가 거부하는 미지의 것에 대해서는 이단처럼 취급당한다. 모험심이 강한 어떤 이가 미지의 것을 찾아 뜻을 이룬다 해도 다수의 사람들은 그를 비난한다. 그들은 거부된 것을 배척하는 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그만큼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된다. 개인으로서는 언제나 주변이 두렵다. 항상 누군가와 같이 있고, 같은 행동을 하며 자신을 보호한다. 바로 다른 집단의 형태로부터 말이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인간의 특성이라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그런 선택을 통해 생태계에 살아남은 이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집단으로부터의 보호는 타 집단과의 대립으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혹은 무리가 없는 개인을 향한 공격할 수 있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무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만약 무리에서 벗어나거나 조금 다른 특색을 가진다면 그들은 그가 잘못했다며 비난한다. 무리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처럼 튀어나온다. 만약 내가 옹호한 순간 나는 무리에서 벗어나야 할 테니까. 그리고 무리에서 버려진 순간 누군가의 공격 대상으로 전락하기에 더욱 사납게 달려든다. 가끔은 개성이라는 이유를 들이밀면서 이야기를 시도한다. 각자 나름의 방식과 특징을 가져도 괜찮다고 설득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보편적인 유행은 나를 주변 사람들에 섞이게 만들기 편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혼자가 되지 않으려는 강박적인 의식이 인간을 다수의 동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겁쟁이로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집단을 가지고 인간이 살아남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졌기에 그것을 나쁘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현대사회는 특히나 더 많은 집단이 생겨나고 이어져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런 집단들이 서로를 인정해준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집단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이야 조금씩 관계의 장을 열어두고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에서는 조금의 사건이 일어나면 먼저 집단과의 경계와 폭력을 선보인다. 평범한 개인이 종교집단, 국가와 사회, 인종 등의 여러 묶인 공간에서 동조한다.
그렇게 더 큰 문제들이 사회 전반에 튀어나온다. 분명히 다를 수도 있고, 진리를 찾다 보면 서로 다른 지점에 맞닿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대한 집합체에게 진리가 정해진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은 전부 적이 된다. 다만 독재자가 탄생되어 그를 중심으로 뭉쳐져서 생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제3제국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처럼 말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학살을 동조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에 대해 침묵했다. 혹은 전쟁의 잔혹함을 알지만 독일제국의 영광이라는 이유로 히틀러를 존경했다. 가끔씩은 내 의지가 아니라고도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사성어의 삼인성호처럼 자신은 틀렸다고 믿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주장하기에 결국 스스로 설득해서 옳다고 믿는 동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브루노와 같은 인물은 힘겹게 살아간다. 자신은 알고 있어도 숨기면 그만이다. 그저 남들과 같은 생각으로 본 것을 덮어두고 스스로를 설득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별을 봤다는 주장을 펼친다. 설령 거짓말쟁이라고 모욕을 당해도 상관없다. 그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무딪히며 살아간다. 그리고 루비치 또한 그런 아빠의 행동을 믿고 따랐기에 여정의 끝에 도달했을 수도 있다. 아빠의 말을 밎지않고 평범하게 살아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별을 봤다는 이야기는 모두 헛소리이다라고 믿고 남들과 어울리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루비치는 굴뚝청소부가 되었다.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었지만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연기 너머의 별을 보기를 희망했다. 처음에는 아빠 때문이지만 점차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해나간다. 그래서 별을 보겠다는 의지는 점차 별을 보기 위해 직접 행동으로 나섰다.
나는 루비치의 여정을 통해 인간은 집단 속에 파묻혀 있을 때 진정으로 안전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누구나 똑같기에 나는 타인에게서부터 안전하다고 믿어왔다. 타인은 곧 나와 비슷하기에 나는 안정감을 느낄 뿐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개인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집단속에 갇혀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와 진리를 놓친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선 용기 있는 자들의 행동에 집단은 공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공격 대신 그들을 향해 응원과 의지를 보여줄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를 수도 있다. 아니면 미지의 세계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떠한가 어차피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른다. 미지의 세계가 진리는 아닐지라도 지식은 집단에게 나눠갖고 살아간다. 그만큼 집단으로부터 벗어나 처음 그 세계를 경험하는 이들의 의미는 매우 크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은 항상 기다리기만 해서도 안된다. 대신 우리는 그들에게 악수할 수 있을 만큼 손을 뻗을 줄 알아야 한다. 나와 다른 게 아니라 조금은 특별하다고 믿는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굴뚝 마을에서 환한 별을 보게 만든 루비치처럼 말이다.
점수 : 3.0 / 5.0